나랏빚이 과도하게 불어나지 않게 브레이크 역할을 해줄 ‘재정준칙’ 발표가 추석 연휴가 지난 10월로 또 다시 연기됐습니다. 8월에 발표하겠다던 게 9월로 미뤄지고, 이번에는 또 다시 10월로 연기된 것인데요. 정부가 공언한 재정준칙 발표 시점이 이렇게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與 “재정준칙 발표, 서두르지 않았으면” 기재부 “뱉어둔 말이 있어서…”
우선 ‘재정준칙’은 정부가 국가채무비율 등 재정 건전성 주요 지표의 한도를 정해 이를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한국, 터키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도입했을 정도로 보편화 됐는데요.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에는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40%가 재정 건전성에 관한 암묵적인 마지노선이었으나 이 비율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별도의 재정준칙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며 관련 논의가 불붙게 됐습니다. 앞서 박근혜 정부 때였던 지난 2016년 정부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은 3% 이내, 국가채무는 45% 이내로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법제화한 재정 건전화 법 제정안을 국회에 냈으나 처리가 불발된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재정준칙 법제화까지는 험로가 예상됩니다. 국회 논의 전 단계인 정부의 재정준칙 발표 시점부터 미뤄지고 있는 게 대표적인데요.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지난 6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재정준칙에 대해선 8월께 국회에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할 때 같이 제출하도록 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이후 8월 장기재정전망 발표와 함께 재정 준칙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지만, 정부는 또 다시 9월 말까지는 발표하겠다며 일정을 연기했습니다. 수차례 공언했던 발표 시점인 9월 말이 되어서도 정부는 9월 중 발표를 위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었는데 결국 무산됐습니다.
재정준칙 발표가 이처럼 몇 달째 늦어지고 있는 데는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영향이 큽니다. 1일 국회와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민주당은 9월 말 비공개 당정 협의 자리에서 기재부에 “재정준칙 발표를 서두르지 말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기재부는 이에 뱉어놓은 말이 있어 계속 미루기는 힘들다는 취지의 답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9월 중 발표를 수차례 공언했기에 더 이상 미루기는 쉽지 않다는 의사를 밝힌 셈입니다.
당 차원에서 재정준칙 발표를 미루고자 하는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우선 문재인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를 뒷받침하고 있는 여당으로서 민주당은 재정 준칙 도입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정부의 재정 투입이 일정 부분 불가피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 19) 확산 국면에서 재정준칙을 만들 경우 재정의 경직성이 커지고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됐다 무산된 재정준칙을 왜 하필 이 시기에 우리가 맡아서 해야 하느냐는 불만도 당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들은 물론 여권 주요 인사들이 일찍이 재정준칙 도입 반대 의사를 밝히며 의견을 개진해왔는데요. 대표적으로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이자 기획재정위원회 소속인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장기적으로 재정준칙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코로나19 위기가 한창인 현시점에서 준칙을 만들면 재정의 경직성이 커지고 불필요한 논란도 생길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며 “국가재정운용의 발목을 스스로 잡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같은 당 기동민 의원도 재정준칙 도입에 지속적인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습니다. 기 의원은 “외국의 경우 자신들이 금과옥조처럼 맹신했던 재정준칙 문제에 대해 지금은 다른 접근과 다른 프로세스를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는 굳이 왜 이 시기에 논쟁을 자초할 수밖에 없는 사안을, 과거에 했던 얘기가 있다는 이유로 얽매일 필요가 있느냐”며 “자칫 국민적 논의가 숙성되지 못한 채 발표됐을 때는 야당으로부터 기준도 원칙도 없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재정준칙을 만드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재정준칙 법제화 시기를 최대한 늦춰보려는 의도가 녹아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달 정부가 재정준칙의 뼈대가 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표하더라도 40일 간의 입법 예고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국회로 관련 법이 넘어가는 시점은 빠르면 12월 또는 내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회로 넘어가면 본격적인 험로가 시작됩니다. 당 차원에서는 관련 법 처리를 반대할 것이고, 야당도 재정준칙의 유연성을 문제 삼으며 보다 구속력 있는 재정준칙을 요구하며 관련 법 처리는 하염없이 지연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년 중 본격적 국회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데 내후년 초 당장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재정준칙 수치는 시행령에…코로나 등 위기 시 예외조항
정부가 10월 초 발표할 재정준칙은 큰 틀에서 국가재정법을 개정하고 단서조항으로 코로나 19 등 위기상황 관련 내용을 담되, 재정적자 및 국가채무 비율 등의 수치는 대통령령으로 구체화하는 방식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경직적으로 절대적 비율을 법에 못 박는 것에 부담을 느껴 시행령을 활용하는 우회로를 택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대통령령은 국무회의를 거쳐 제정, 공포하면 되기 때문에 국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그때그때 바꿀 수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아울러 정부는 재정준칙에 유연성을 주기 위해 위기 시 적용 예외 조항을 둘 계획입니다. 일단 현재로서는 국가재정법상 추경 편성 요건 등을 토대로 하는 예외 조항이 거론되는데요. 전쟁이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상 사회·자연재난 등 대규모 재해가 있을 경우, 경기침체, 대량실업, 남북관계의 변화, 경제협력과 같은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이 해당합니다. 현재 코로나19 위기가 심각하고 완전한 극복 시점도 예측하기 어렵기에 재정준칙을 마련하더라도 실제 적용까지 유예기간을 둘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앞서 “일부 국가가 코로나를 겪으며 채무 준칙 일시 유예 조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 국가는 준칙에 예외 사유를 두지 않아 (재정 투입에) 제약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국가는 준칙 도입 때 일정기간 적용을 유예하고 예고제를 해 연착륙 조치를 강구하기도 했다”고 해외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세종=하정연기자 ellenah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