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사회와 소통하는 철학자’로 이름난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학교를 떠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학계는 술렁였다. 정년이 7년 넘게 남은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광야로 나서겠다는 최 교수의 선택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논문의 세계’를 버려야 일평생 지향해온 ‘이야기의 세계’와 만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존 교육 시스템에서는 창의적 생각의 기틀이 되는 새말과 새 몸짓을 일궈낼 수 없다는 절박함도 한몫했다. 그는 올 1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을 설립한 뒤 어린 시절을 보낸 전남 함평에 ‘호접몽가’를 마련하고 오는 17일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첫 강좌를 연다.
최 교수는 7일 강남구 청담동 사무실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를 문명 전환의 방아쇠로 삼아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며 “한국이 전술국가에서 전략국가, 즉 선도국가로 올라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어 “선도국가가 되려면 창의적이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국내 정치상황과 관련해서는 “우파도 낡았고 좌파도 낡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말로는 정의와 공정을 떠들면서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행위를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라며 “결과적으로 촛불혁명은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요즘 우리나라가 방향을 잃은 것 같다는 지적이 많다.
△국가는 그 시대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의제, 즉 어젠다를 갖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대한민국의 주요 과제는 건국·산업화·민주화였다. 해방 직후에는 나라를 세우는 게 가장 큰 사명이었다. 건국한 다음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갈등과 혼란이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농촌을 중심으로 한 농업세력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공업세력으로 주류세력도 바뀌었다. 기득권 조정은 자연스럽게 민주화로 연결됐다. 짧은 기간에 건국·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는 직선적 발전을 이뤘고 세계에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사회가 선순환하는 것은 시대에 맞는 어젠다를 설정하고 이를 잘 해결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민주화 다음의 어젠다는 무엇인가.
△선진화다. 선도력은 독립된 주체들이 발휘할 수 있는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다. 독립된 주체들이 ‘우리’라고 하는 우리에서 이탈해 자신만의 독립적 자발성을 발현해야 한다.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면서 스스로 책임지는 토양 위에서만 창의성이 나올 수 있다. 진영논리나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함에 집중한 주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음 의제를 설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전략국가를 자주 강조하는데.
△전술국가를 넘어 전략국가로 도약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이다. 남이 짜놓은 판 위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하는 나라가 전술국가라면 직접 판을 짜는 나라가 전략국가다. 그런데 판이 흔들리지 않으면 후발주자가 선도그룹으로 올라설 가능성은 없다. 4차 산업혁명 도래와 코로나19발 위기가 현재의 판을 뒤흔들고 있다. 기존 판에 균열이 생기는 지금 운 좋게도 나라의 공력 또한 강하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확인했고 K방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선진화된 의료 시스템도 갖췄다. 드라이브스루 선별진료소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위기상황에서 우리의 창의성은 놀랍도록 빛을 발한다. 바로 지금이 종속국가로 살아온 대한민국이 전략국가로 올라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만큼 역량이 갖춰졌는지 의구심이 든다.
△한 나라가 침체기에 들어갈 때 종교든, 문화든, 교육이든 한 부분이라도 깨어 있으면 이게 생명수 역할을 하면서 위기를 뚫고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부분이 깨어 있는가. 유일하게 깨어 있는 집단이 기업이다. 기업인은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서 생존을 위해 절치부심하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깨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절호의 기회를 맞은 중요한 순간에 유일하게 깨어 있는 기업에 거대한 위기가 닥치고 있다. 온갖 규제로 옭아매면서 그나마 깨어 있는 기업들조차 생존을 포기하게 만든다.
-한국은 ‘규제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데.
△도덕주의·이념주의가 사회를 죽이는 대표적 병폐다. 사회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역설적으로 도덕주의가 팽배한 사회가 가장 도덕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삶은 도덕적이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는 도덕을 강요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선진화된 사회의 기풍은 얼마나 맘껏 도전할 수 있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민의 자유가 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도덕주의에 빠지면 온갖 규범을 만들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끌고 가려고 한다. 순리에 맞게 흘러가야 하는데 자기들(집권층 혹은 기득권)이 원하는 방향으로 억지로 끌고 간다. 여기에다 이념까지 더해지면 극단적 방식으로 규제한다.
-교육의 문제도 적지 않은데.
△국가는 조세와 국방이라는 두 개의 굳건한 기둥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이를 작동시키는 두 개의 톱니바퀴는 교육과 정치다. 우리는 교육이 잘못됐기 때문에 정치도 실패했다.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능력을 발현해야 하는 정치 부문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교육을 통해 생각하고 반성하는 능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양질의 정치 역량이 공급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한국 정치가 예능정치·기능정치·진영정치로 전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한국 정치에 진정한 진보세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진보는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려면 변화해야 한다. 어느 세력을 보수라고 하고 다른 세력은 진보라고 하면 처음부터 가치의 우위가 정해진다. 진보나 보수는 그냥 형용하는 말일 뿐이다. 우파든 좌파든 정책의 각론에 따라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 판단해야 한다. 정치를 과학적·수평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은 좌파와 우파다. 이 개념을 적용하면 대한민국은 보수 우파와 보수 좌파만 있는 나라다. 우파도 낡았고 좌파도 낡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은 몇십년 동안 해온 생각, 해온 행위를 그대로 하고 있지 않은가. 썩은 물이 고여 있을 때 이를 확 뒤집는 것을 혁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촛불혁명을 했다고 믿고 지금 정권 스스로도 촛불정권이라고 규정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혁명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촛불혁명은 실패했다.
-촛불혁명이 실패했다고 보는 이유는 뭔가.
△혁명이 실패한 것은 혁명하려는 자가 스스로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하기 때문이다. 혁명 주체세력이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으로 완수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본질적인 삶 속에서 전면적 혁신을 하는 것이 혁명이다. 낙하산인사가 적폐였다며 이 낙하산을 저 낙하산으로 바꾸는 것은 혁명이 아니다. 낙하산인사 자체를 하지 않는 게 혁명이다. 똑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옷만 바꿔 입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세하는 게 지금의 정치판이다.
-시민 역량의 문제인가.
△안타깝게도 우리 실력이 여기까지다.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지 못하고 남의 생각을 충실히 따라하면서 살아온 대가다. 국가로 따지면 중진국 수준에 그친 것이다. 다음 어젠다가 돼야 할 선진화는 생각의 결과를 수용하는 삶에서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생각의 결과를 답습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정해진 생각을 누가 더 과격하게 행사하느냐만 남게 된다. 진영논리에 빠지기 쉽다는 얘기다. 윤리적 행위, 정의로운 행위, 공정한 행위 등의 특징은 본능적 행위가 아니라 숙고의 결과다. 생각할 수 있는 자만 할 수 있는 행위다.
-한국 정치를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비극은 여당이 새로운 시대를 열지 못하는데 야당의 실력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실력 없는 야당, 반성 없는 야당, 진화 없는 야당이 거대한 늪처럼 발목을 잡고 있다. 단적으로 집권세력의 문제점을 아무리 지적해도 대통령의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는다. 실력 있는 대안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들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결국 현재 정치 혼란의 큰 책임은 야당에 있는 셈이다. 야당 정치인을 만나보면 여당 정치인보다 훨씬 한가하다. 절박함이 없다는 얘기다. 좋은지 나쁜지는 둘째치고, 여당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야당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부터 불분명하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년 집권론’을 말했는데 이는 자만심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 상태로 가면 이 전 대표가 말한 20년 집권론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결국 나라는 불행해지고 선도국가로 진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1959년 전남 신안군 하의면 장병도에서 태어나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중국 베이징대 대학원에서 도가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와 캐나다 토론토대 방문교수를 거쳐 1998년부터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올 1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