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완연한 정독도서관 정원을 걷다 문득 생긴 궁금증이다. 어떻게 서울 중심부(종로구 화동)에 이렇게 보물상자 같은 공간이 남아 있게 됐을까. 자료를 보니 이곳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지난 1976년 강남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있었고, 학교 건물이 도서관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학교 이전에 반발한 당시 재학생과 졸업생들을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배려였다고 한다.
경기고가 강남으로 간 것은 그때 시대적 과제였던 서울 인구과밀 때문이었다.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 따르면 1966~1980년 서울 인구는 489만3,500만명이나 늘었다.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간 매일 더 늘어난 셈이다. 이에 인구과밀 해소를 위해 강남 개발 계획이 세워졌고 명문고 이전이 뒤따른 것이다. 공립명문 경기고 다음으로는 사립명문 휘문고가 1978년 종로구 원서동(현재 현대빌딩 본관)에서 강남구 대치동으로 옮겨갔고 서울고(1980년)·숙명여고(1981년)·중동고(1984년)·경기여고(1988년) 등의 강남행이 이어졌다.
인구과밀 해소가 시급한 시점에 명문고의 강남 이전은 주효했다. 강남 개발은 1970년 ‘남서울개발계획’으로 시작됐지만 5년이 지나도록 탄력이 붙지 않았다. 1972년 압구정동과 논현동·청담동 등지에 1,350동의 주택을 분양하는 등 주택공급을 늘리는 한편 강북지역에는 유흥시설·백화점·대학 등의 신증설을 엄금하고 강남지역에는 파격적인 면세 혜택과 대출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음에도 1975년 영동(강남구·서초구) 인구는 11만6,000여명에 그쳤다. 당시 서울 인구가 688만여명이었음을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보다 못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3월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라”고 특명을 내렸고 이듬해 경기고 이전을 기점으로 강남으로의 인구 유입이 본격화했다.
문재인 정부에도 강남 집값 잡기에 교육 정책을 접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거주지 학군 내에서 추첨으로 배정하는 현행 중학교 배정 방식을 ‘학교지원제(선지원 후추첨)’로 바꾸려 하고 있다. 제도가 변경되면 강남 이외에서도 강남의 중학교로 지원이 가능해져 강남 인구유입 억제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그런 효과보다는 강남지역으로의 지원이 몰리는 등 부작용이 되레 더 클 수 있다. 게다가 지난해 자사고·특목고 폐지 정책을 발표해 강남 집값을 들썩이게 한 정부가 다시 교육 제도를 건드려 집값을 잡겠다는 모양새다. 누가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자사고·특목고 폐지 발표 이후 초중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강남행은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감정원이 발표한 9월 전셋값 상승률에서 서초구(0.63%)·송파구(0.59%)·강남구(0.56%) 등이 서울 평균(0.41%)에 비해 유독 높은 것에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 강북 일대의 자사고와 특목고를 없애면 그만큼 강남 8학군의 명문고로 학생이 몰릴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이치임에도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정책을 편 것이다.
부동산 시장 안정은 지금의 시대적 과제다. 정확한 현실 인식과 강한 돌파 의지가 있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전국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히려 하락했을 정도로 안정화되고 있다”고 하더니 올해 7월에는 “세계적으로 유동자금은 사상 최대로 풍부하고 금리는 사상 최저로 낮은 상황에서 정부는 최선을 다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앞뒤 말이 달라지면 정책 실행력에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경기고가 강남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1970년대 강남 개발은 상당히 지지부진했을 것이다. 물론 명문고의 강남 이전을 밀어붙인 것은 비난받을 일에 가깝다. 그래도 박정희 정권은 그렇게라도 해서 서울의 인구폭발을 막아냈다. 민주화 시대의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문제에서 다른 차원의 해결 능력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hns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