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사내 타운홀 미팅에서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수석부회장은 첨단 모빌리티 솔루션 업체의 그림을 제시하고 ‘인간 중심 모빌리티’ 철학을 내세웠다. 13일 싱가포르에서 첫 삽을 뜬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는 정 수석부회장의 청사진을 실현할 개방형 혁신기지다.
오는 2022년 완공 예정인 HMGICS는 자동차를 만들기만 했던 생산공장과 궤를 달리한다. 차량 주문부터 생산·시승·판매·관리까지 고객의 생애주기형 차량 이용형태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거대한 실험실이자 혁신기지다. 현대차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기기 및 서비스의 종합 실증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건물 옥상에는 620m의 고객 시승용 ‘스카이트랙’과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이착륙장도 설치된다. 여기에 전기차와 수소연료전지차량 연구개발 및 생산도 함께 이뤄진다. 개별적으로 진행됐던 현대차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구상을 한곳에서 통합해 연구하게 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고객을 중심에 두고 미래 모빌리티 가치사슬을 혁신한다는 계획이다. 이날 기공식에서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은 ‘모빌리티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인간 중심의 밸류체인 혁신’을 바탕으로 고객 삶의 질을 높여나갈 것”이라며 “HMGICS에서 구현될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고 인류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HMGICS는 현대차그룹에 의미 있는 도약이며 세계 최초의 설비”라고 환영했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고객 중심의 혁신제조 플랫폼을 개발하고 실증하는 작업을 HMGICS에서 진행한다. 소규모 다차종 생산체계도 갖춰진다. 고객이 스마트폰 등 편리한 수단을 통해 온라인으로 자동차를 계약하면 곧바로 주문형 생산기술을 반영해 생산되는 식이다. 고객은 편한 시간대에 HMGICS를 찾아 본인 차량이 생산되는 과정을 관람하고 완성차가 옥상 스카이트랙으로 옮겨지면 시승해본 후 차를 인도받게 된다.
생산방식은 고도로 자동화된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보틱스 등 첨단기술을 접목한 사람 중심의 지능형 제조 플랫폼을 실증할 테스트베드로 활용된다. 소규모 전기차 시범 생산체계를 갖춘다. 이를 통해 인간 중심의 안전하고 효율적인 작업환경이 구축될 것이라는 게 현대차 측의 설명이다.
HMGICS에서는 미래 모빌리티 서비스와 같은 신사업 발굴 및 검증도 동시에 진행된다. 렌털·리스 등 배터리 생애주기 연계 서비스(BaaS·Battery as a Service) 실증을 통해 고객의 전기차 구매부담 경감 및 사용편의성 개선 방안도 연구한다.
현대차그룹이 미래 모빌리티의 전초기지로 싱가포르를 낙점한 것은 미래 성장성, 기술 수용도, 인재 확보 등 여러 방면에서 최적의 조건을 갖춰서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물류와 금융·비즈니스 허브로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트렌드에 대한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동남아 시장의 전초기지로 꼽힌다. 차량 공유업체 그랩 등 다수의 글로벌 기업이 싱가포르를 동남아 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로 활용하면서 동남아 시장 진출에 나서고 있다. 이들 글로벌 기업과 협업할 경우 현대차그룹은 동남아 시장을 주도한 일본 차 업체들을 넘어설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도시국가라는 특성도 한몫했다. 작고 복잡한 싱가포르의 환경이 미래 모빌리티가 실제로 상용화될 도심지 환경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다.
싱가포르에는 연구개발을 위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용이한 환경도 갖춰졌다. 싱가포르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 1위 국가이자 스위스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하는 세계 인재경쟁력 순위 아시아 지역 1위 국가다. 이를 십분 활용해 현대차그룹은 싱가포르 현지 대학과 스타트업·연구기관과 긴밀한 협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한편 이번 온라인 기공식을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중단됐던 정 수석부회장의 글로벌 경영행보가 재개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 수석부회장은 올 2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전미주지사협회 동계회의 리셉션에 참석한 후 해외 행사를 자제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