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 차렸을텐데 풀어주지.…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 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 먹자.”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정부패 척결’을 발표하고 재계 12위까지의 재벌 회장들을 모조리 부정 축재자들로 몰아 구속한 터였다. 그런데 5·16 당시 일본에 있던 재벌 1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귀국을 미루며 협상의 여지를 탐색했다. 귀국한 이 회장은 바로 다음 날인 6월 27일 박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이 회장은 당당히 주장했다. 부정 축재자라고 비판하기 전에 한국전쟁 전비 충당을 위해 과하게 높은 세율을 매겨 놓은 세금 제도 자체의 문제를 살펴달라, 부정 축재라는 이유로 한국의 대표기업 경영자들을 모두 잡아 가둬 경제활동이 위축되면 국민 빈곤을 해결하겠다는 혁명정부의 목적 달성도 불가능해지니 기업인들이 경제 개발을 위해 적극 투자활동에 나서게 하라는 제안을 했다. 박 대통령은 이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였고, 6월30일 부정축재 처리위원회는 재산 목록과 재산헌납 각서를 받고 기업인들을 석방했다.
경영학자로서 정부의 규제와 정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해박한 연구로 유명한 최성락 동양미래대 교수는 한국 경제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선택들을 집중 조명한 신간 ‘49가지 결정’에서 근대화·산업화의 시작지점인 1960년대를 ‘박정희-이병철 면담’으로 시작한다. 책은 세계 10위권 경제력에 도달한 대한민국 경제사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들만 추렸다. 저자는 “이전과 달리 5·16 직후의 재벌과 정권 간 유착에서 정권의 목적은 경제개발이었고, 재벌은 투자를 통한 국가경제 기여로 한국 경제 성장의 여러 동력 중 하나가 됐다”면서 “1961년부터 암묵적으로 내려온 유착 관계에 최근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역사에 대한 저자의 기록에서 ‘그때는 옳았으나 지금은 틀리다’ 싶은 결정들이 눈길을 끈다. 1971년에 처음 개발금지구역으로 설정된 ‘그린벨트’는 도심 주변에 녹지를 계속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추진됐다. 전 국토의 5.4%에 해당하는 엄청난 면적이었으나 “그냥 아무 곳이나 그린벨트를 지정”한 것이 문제가 돼 도심 포화로 인한 그린벨트 해제는 폭발적 땅값 상승의 도화선이 됐다. “부동산 투기 문제의 원천”이 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은 경부선 철도 개통을 시작으로 대졸 여직원 공채, 서울올림픽, 낙동강 페놀 사건, 금융실명제 실시, IMF 외환위기,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 등 역사적 결정이 오늘날 우리 경제에 미친 파장을 더듬는다. 1만6,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