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이건희 별세]삼성, 이건희 체제서 얼마나 성장했나

삼성그룹 비약적 성장 핵심에

회장-미전실-계열사 삼각편대

삼성전자 양대 축 반도체·휴대폰

이 회장 결단 덕에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 설득해 반도체 사업 진출

스러져가던 휴대폰 사업 되살려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사진제공=삼성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사진제공=삼성



삼성은 고(故)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매출은 87년 취임 당시 9조9,000억원에서 2014년 400조원으로 무려 40배나 늘었고 종업원 수 역시 1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었다. 협력 업체까지 감안하면 600여만 명이 삼성과 관련있다. 삼성전자(005930) 단일회사가 전체 법인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나 될 정도로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독보적이다.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이 회장이 이룩한 성과는 이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삼성은 세계 정보기술(IT) 업계를 호령하고 있다. D램 반도체가 92년 세계 첫 1위가 된데 이어 낸드 플래시메모리(2002년),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2005년), 평판TV(2006년), 스마트카드IC(2006년)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삼성의 성장에는 회장-비서실(미래전략실)-계열사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의 힘이 컸다. 회장이 큰 그림을 그리면 비서실에서 이를 바탕으로 실행 계획을 짜고 계열사가 실행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신규 사업 발굴에서부터 대규모 투자, 그룹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등이 일사분란하게 이뤄졌다.

삼성의 비약적인 성장에는 삼성전자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휴대폰 사업은 전자를 이루는 양대 축이다. 이 분야의 성공은 이건희 회장의 전격적인 결단이 있어 가능했다.

전자사업은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이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며 시작했다. 이 회사는 84년 2월 지금의 삼성전자로 사명을 바꿨다. 1974년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했다. 당시 경영진들은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느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74년 12월 6일 사재를 털어 자금난에 허덕이던 한국 반도체의 지분 50%을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어 부친을 설득, 반도체 사업 진출을 이끌어 낸다.

이어 1977년 미국 ICII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지분 50%도 인수했으며 1978년 3월에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했다. 하지만 한국반도체 공장은 말이 반도체 공장이지 트랜지스터 웨이퍼를 생산하는 조악한 수준의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 장벽을 뛰어넘기란 어려웠다. 이건희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무려 50여 차례나 드나들며 미친 듯이 인력을 확보했다. 또 미국 페어차일드사를 여러 차례 방문해 기술 이전을 요청한 끝에 지분 30%를 내주는 조건으로 승낙을 얻었다.

1983년 12월 64kD램을 생산 조립까지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하며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10년에서 4년으로 좁히는데 성공한다. 이어 84년에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이 완성됐지만 반도체 사업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87년 취임 이후 이회장에게 그룹 수뇌부가 반도체 사업 포기를 건의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라며 당시 임원들에게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공장 ‘평택 2라인(P2)’ 가동./사진제공=삼성삼성전자의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공장 ‘평택 2라인(P2)’ 가동./사진제공=삼성


다음해인 1988년 반도체 시장의 불황이 마침내 끝났다. 256kD가격이 1.5달러에서 6달러로 치솟았다. 고 이병철 선대회장이 타계 직전 기공식을 한 3라인은 1988년 완공되자 마자 풀가동 됐다. 계열사로 있던 삼성반도체를 합병한 삼성전자는 그 해 지금까지 반도체에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84년 반도체 개발진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 반도체 용량을 높이기 위해 위로 쌓아 올릴 것인지(스택방식), 아래로 파 내려 갈 것인지(트렌치 방식)를 두고 고민에 빠진 것이다. 당시 D램 세계 1위였던 도시바는 트렌치 방식을 선택했다. 이건희는 스택방식을 선택한다. 쌓는 것이 파고 내려가는 것보다 쉽다는 생각에서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4M D램 개발 경쟁에서 선진국들과 개발 격차를 좁힐 수 있었고, 16MD램에서는 선두업체와 동시에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93년 6월에는 삼성은 8인치 양산 체제를 세계 최초로 구축한다. 당시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표준이었지만 이 회장은 생산량 확대가 용이한 8인치 웨이퍼 개발을 지시한다. 그 결과 삼성은 생산력에서 일본 기업을 월등하게 앞서며 세계 1위에 오른다. 이후 22년 연속으로 메모리 분야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하는 대표적 자본 집약형 사업인 반도체의 경우 최고 경영진의 의사결정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성패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변곡점마다 이 회장이 보여준 결단력은 세계시장을 석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삼성이 메모리 사장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선 데는 강력한 오너의 리더십 때문이다. 90년대 앞서나가던 NEC, 도시바, 후지쯔 등이 불안정한 업황 때문에 주저하는 와중에도 오너의 결단력으로 이들 기업의 4~5배 규모의 과감한 설비 투자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시장 조사기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상성전자의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D램 41.4%, 낸드플래시는 27.9%로 독보적 1위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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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또 결단력으로 휴대폰을 주력으로 육성했다. 삼성은 1994년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하며 휴대폰 시장에 뛰어든다.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시장 진출 1년만에 글로벌 1위인 모토롤라를 제치고 국내 시장 점유율 51.5%를 차지하며 ‘애니콜 신화’를 만들었다.

삼성 휴대폰 사업은 또 한차례 위기를 맞았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피처폰 수준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이폰이 국내에 들어오며 통신시장을 뒤 흔들자 삼성은 미완성작인 옴니아 시리즈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이폰에 비해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모두 떨어졌던 옴니아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경기침체까지 겹치며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붕괴 직전까지 갔다.

쓰러져 가던 삼성의 휴대폰을 살린 것은 때마침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건희 회장이다. 이 회장은 무선 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하는 체질 개선으로 초강수를 뒀고, 삼성 휴대폰 기술의 총 집약체인 갤럭시S를 재빨리 선보였다. 갤럭시S는 출시 7개월만에 전세계적으로 1,000만대가 팔리면서 삼성 휴대폰 사업의 부활을 알렸다. 아이폰 천하는 아이폰과 갤럭시의 양강체제로 바뀌었다. 급기야 삼성전자는 갤럭시S 출시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폰 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삼성의 스마트폰은 최근 점유율 22.4%로 전세계 1위를 차지했다.

아이폰을 따라잡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퇴근을 마다하고 연구실 야전침대에서 숱한 밤을 새워가며 연구한 도전정신이 신화창조로 이어졌다. 또 삼성전자는 갤럭시S3 출시를 앞두고 스마트폰 케이스 불량이 발생하자 돌연 갤럭시S3의 출시 일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곧바로 불량 스마트폰 케이스를 모두 폐기 처리했다. “불량은 암과 같다”는 이 회장의 20년 전 강연 내용이 여전히 삼성그룹 임직원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기에 가능했다.

업계관계자는 “갤럭시S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전자의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애플은 부품을 수입해 중국 등에서 제품을 조립한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수직계열화를 갖추고 있어 애플에 비해 제조에 강점이 있다. 삼성전자는 이를 활용해 스마트폰 라인업 다양화를 시도했다. 프리미엄 제품부터 중저가 보급형 제품까지 모든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 컨설팅회사의 한 간부는 “삼성전자는 부품 생태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 강점”이라며 “10~20개 모델을 시장에 내놓고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삼성전자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갤럭시S시리즈부터 삼성은 글로벌기업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세계 1위 제품을 본격적으로 늘려나간 시기도 이 때부터다. 이전까지 D램 반도체에 국한됐던 삼성의 월드베스트제품이 급격하게 늘었다.

이 회장이 취임할 당시만 해도 하이테크 산업인 전자 업종에서 삼성이 입지는 초라했다. 일본의 소니와 파나소닉을 배우려 했고 미국 IBM등의 기술력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일본을 배운다는 것은 베끼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소니와 파나소닉을 물론 인텔과 HP등을 제치고 오히려 이들의 거센 추격을 받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올해 영국 브랜드파이낸스가 선정한 글로벌 브랜드 랭킹에서도 삼성은 애플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브랜드 가치는 약 90조원에 달했다.

더불어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철학 아래 최고의 인재를 키워내는데 집중 투자했고 10년 후에는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경영론’으로 직원들을 이끌었다.

세계적인 대학에서도 삼성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국 최고의 MBA스쿨인 하버드대에서는 2004년 삼성의 반도체 성공사례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했다.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과 이후 전세계 반도체 시장 1위를 지켜내는 노력을 배우고자 한 것이다. 이 과정은 MBA학생 1학년이 필수과목으로 수강생만도 1,000여 명에 달했다.


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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