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 유해란은 ‘골프여제’ 박인비, 세계랭킹 1위 고진영을 앞질러 우승했다. 신인 자격도 없는 추천선수 신분이었다. 올해 8월에는 US 여자오픈 우승자 이정은을 2위에 두고 같은 대회에서 또 우승했다. 나흘간 몰아친 버디가 무려 25개였다. 전설 같은 선배들을 앞지르는 우승을 두 번이나 했는데 아직 열아홉이다. ‘슈퍼루키’ 유해란(SK네트웍스) 얘기다.
176㎝의 큰 키와 정교한 아이언 플레이가 돋보이는 유해란은 KLPGA 투어 정식 신인이 된 올해 압도적인 신인상 포인트 1위를 달리고 있다. 상금 4위, 대상(MVP) 포인트 5위, 평균타수 6위라 신인상 그 이상도 노려볼 만하다. ‘슈퍼루키’ 유해란을 18문 18답으로 만났다.
-올해 자신한테 해준 가장 큰 선물이 있다면.
△아이패드요. 이동하는 시간은 많고 휴대폰의 작은 화면을 계속 보면 눈이 피로해져서 한 달 반을 고민하다가 샀어요. 8월에 우승하기 전에 샀는데 조금만 더 기다렸다 샀으면 우승 선물이 될 수도 있었겠네요.
-신인상 받으면 하고 싶은 일은.
△그해 루키 중에 가장 잘 쳤다는 거니까 물론 기분이 좋겠지만 평상시랑 다를 건 없을 듯해요. 매사에 덤덤한 편이라 ‘한 시즌 마무리 잘했다고 주는 상이다’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골프 말고 가장 잘하는 것은.
△글쎄요, 골프 말고 정말 해본 게 없어서…. 돌아보니 정말 그렇네요. 어릴 때는 그림 그리기나 만드는 거 좋아했어요. 그림으로 상 받은 기억도 나고. 손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계속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하는 아이였어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성격은.
△막 활발하지는 않은데 아주 낙천적이에요. 마음처럼 안 되는 게 있어도 빨리 기분이 풀려요. 굳이 말하자면 그런 성격이 골프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요. 아, 그리고 차분함이 지나쳐서 행동도 느린 편이에요. 그런데 볼 치는 건 또 빠르다니까요.
-경기 중 되뇌는 말이 있나요.
△경기가 5~6시간이나 걸리잖아요. 그러다 보니 계속 뭔가를 스스로 얘기하기는 해요.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럴 수 있지’. 실수가 나오면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되뇌면서 바로 털어버리려고 해요. 하지만 생각지 않던 실수가 나오면 솔직히 화가 나기는 하죠.
-요즘 뒷심이 특히 무서운데(유해란은 최근 마지막 날 63타, 67타 등으로 최종일 감이 예사롭지 않다).
△마지막 날이 되면 좀 더 과감해진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이니까 다음이 없잖아요. 집중도 더 잘 되고. 올해 챔피언 조에 서너 번 들었는데 처음에는 의욕이 앞서 실수가 많았어요. 그다음부터는 챔피언 조에 들어가도 ‘어차피 우승은 내 것이 아닌데’ 라고 놓아버려요. 챔피언 조 못 들어가면 그 전날 잘 안 풀렸다는 얘기니까 ‘잘 되려면 전날 잘 됐겠지. 우승 아닐 거야’ 하고 들어가고요.
-롤모델이 없다고 들었어요.
△네, 그저 하루하루 연습량 해내는 것만 생각하면서 오다 보니…. 지금이라도 롤모델 한 분 만들어야 할까 봐요(웃음).
-대회 기간 징크스나 일부러 피하는 음식 같은 게 있나요.
△밥에 반찬을 섞어 먹지 않아요. 덮밥을 시킨다 해도 비비지는 않고요. 국밥도 먹기는 하는데 밥공기를 뒤집어서 한 번에 말지는 않아요. 복 달아난다고 하지 말라는 얘기를 아빠한테 많이 들어서요. 무심코 아빠가 한 번에 말아먹으려고 하면 제가 말리죠. “아빠, 제발!”
-코로나가 사라지고 하루 동안 완벽한 자유가 주어지면 뭘 하고 싶나요.
△친구들이랑 서울 돌아다니기요. 그동안 일만 잠깐 보고 바로 집에 돌아가곤 해서 서울을 자세히 구경한 적이 없어요(광주 출신의 유해란은 경기 용인에 산다).
-시즌 뒤 계획은요.
△아빠랑 협상을 해봐야죠. 합의가 잘 되면 2~3일이라도 푹 쉴 수 있지 않을까요.
-해외 진출 계획은요.
△아직 멀었죠. 국내 투어에서 영향력 있는 선수가 되면, 편하게 골프 칠 수 있는 때가 되면 그때 생각해봐야죠. 지금은 배울 게 더 많고 경험할 것도 많아요. 우승을 해봤다고는 하지만 선배 언니들처럼 오래 친 것도 아니고요. 새로운 상황들이 정말 많이 닥칠 거라고 봐요. 더 겪고 (외국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골프가 지긋지긋했던 기억도 있는지.
△‘지긋지긋’까지는 아니고 조금 지루해했던 때는 있죠. 일찍 골프를 시작(초등학교 1학년)하다 보니 아마추어 시절이 길었어요. 금전적으로 버는 게 없으니 빨리 프로 무대에 가고 싶은 마음에 중3에서 고1 때까지 좀 지루한 감이 있었어요.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 하고 싶다’하는 나만의 버킷리스트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가서 우승 한 번 해봐야죠.
-18홀 라운드 기회가 딱 한 번 남았다면 누구와 함께할 건가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선수들이랑 쳐보고 싶어요. 특정한 누구도 아닌, 그냥 거기 뛰는 선수들이랑요. 공 때리는 것 자체가 다르잖아요. 보고 있으면 자괴감이 들 정도라니까요. 거길 보면 ‘스윙에는 정답이 없구나’ 느껴요. 골반을 틀었다가 치는데도 똑바로 가고 꼿꼿이 서서 퍼팅해도 다 들어가고…. 반드시 좋은 스윙이어야 좋은 볼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게 맞는 스윙이 좋은 볼을 만든다는 걸 깨우칩니다.
-올해 내가 들은 최고의 칭찬은.
△신인답지 않은 신인.
-요즘 가장 큰 고민은 뭔가요.
△대학교 과제요. 타이핑도 느리고 어떻게 문장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아직 감이 안 와서 정말 난감해요(유해란은 한국체대 1학년이다).
-올 시즌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85점입니다. 사실 100점을 줘도 아깝지 않은 한 해라고 칭찬하고 싶은데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되잖아요. 돌아보면 올 초에 기회가 많았는데 살리지 못한 것도 있네요. 지난 시즌요? 70점요. 시드도 얻고 우승도 했지만 8월 이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급하게 하다가 실수도 많았죠.
-골프는 언제까지 하고 싶나요.
△사실 아마추어 때 너무 힘들었거든요. 연습만 해야 하고 잘 못할 때는 부모님께 혼나고…. 다른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싶다가도 막상 할 줄 아는 건 또 이것밖에 없고요. 하지만 투어 올라와 보니 이런 직업도 없는 것 같아요. 여러 곳 돌아다니며 경기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되는대로 오래오래 하고 싶습니다.
/서귀포=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