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경제·마켓

영원한 권력 꿈꾸며 '지하군대' 만들었지만...4년에 그친 國運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9> 2,000년을 버틴 ‘진시황 병마용’

1974년 진흙으로 빚은 '수호천사' 세상에 모습 드러내

병사용 7,000여점·마용 500여점·전차 100여대 발굴

수백의 병사 디테일 살려 도열...마치 '군대 열병식' 같아

중국 시안의 ‘진시황 병마용’ 1호갱 내부. 병사용과 마용이 진형을 이뤄 중국을 처음 통일한 기원전 3세기 진나라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위쪽은 발굴 중인 부분이다.중국 시안의 ‘진시황 병마용’ 1호갱 내부. 병사용과 마용이 진형을 이뤄 중국을 처음 통일한 기원전 3세기 진나라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위쪽은 발굴 중인 부분이다.



지난 1974년 중국 산시성 시안에는 몹시 심한 가뭄이 들었다. 같은 해 3월29일 시안 인근의 린퉁현에서 양신만이라는 청년이 동료 5명과 함께 우물을 파고 있었다. 곡괭이로 한참 땅을 파는데 갑자기 ‘쨍’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땅속에서는 도기 파편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2,000여년 동안 잊혔던 진시황 병마용(秦始皇 兵馬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용(俑)’은 사람 등의 모양을 한 흙인형이다. 고대에는 살아 있는 사람을 부장품으로 묻는 ‘순장’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악습으로 여겨져 사라지면서 대신 흙으로 구운 ‘용’을 넣었다. 병마용은 영어로 ‘테라코타 워리어(terracotta warrior)’라고 한다.


양씨 등이 이날 찾아낸 것은 고대중국에서 용의 대표 사례인 진시황의 병마용이었다. 진시황이 사망한 것은 기원전 210년이니 병마용도 그 전후로 묻혔을 것이다. 이어 1976년에는 1호갱 바로 옆에서 2호갱과 3호갱이 연이어 발견된다. 1~3의 숫자는 발굴 순서에 따라 붙인 것으로 가장 큰 1호갱은 길이 216m, 너비는 62m다.

공식 명칭이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인 이 세계문화유산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람객은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1호갱을 먼저 방문한다. 병마용이 발굴돼 드러나 있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 것이 전시장의 모습이다. 1호갱에 들어서면 누구나 ‘아’ 하는 탄성부터 내지른다. 수백의 병사들이 정면을 바라보며 도열해 있는데 마치 군대의 열병식 같다. 병마용 각각은 2,000년 전의 작품이라고는 쉽게 믿기 힘들 만큼 완전한 모습이다.

병사용은 키가 1.8m 내외로 실제 당시 사람들보다 훨씬 큰 편이다. 특히 장교급을 사병보다 더 크게 만들어 구별했다. 병마용은 경무장 보병, 중무장 보병, 궁병, 전차병, 기병, 말 등으로 구분된다. 병사용의 얼굴에는 약 여덟 가지 틀이 사용됐는데 기본형에 수염 등을 붙여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보이도록 했다. 지금까지 모두 병사용 7,000여점, 마용 500여점, 전차 100여대 등이 발굴됐다. 물론 아직 더 많은 수가 땅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시황 병마용’ 2호갱에 전시돼 있는 ‘경무장 보병’.‘진시황 병마용’ 2호갱에 전시돼 있는 ‘경무장 보병’.


1호갱에 비해 2·3호갱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특히 2호갱에는 유리케이스에 담긴 계급별 병사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관람객에게 인기다. 완성도를 볼 때 3호갱부터 거꾸로 관람하는 것이 좋다. 1호갱을 먼저 볼 경우 나머지는 다소 평이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을 당시 수도인 시안 인근에 만들면서 이렇게 대규모 병마용을 함께 묻었다. 즉 죽어서도 영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하군대’가 병마용인 셈이다. 고고학적으로 이 병마용들은 당시 진나라의 군사편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덕분에 우리는 2,000년 전 진나라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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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지하군대도 진나라 자체의 국운(國運) 쇠퇴는 막지 못했다. 진시황이 기원전 210년 죽고 나서 겨우 4년 만인 기원전 206년 진나라는 폭정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으로 허무하게 무너진다. 뒤를 이은 왕조가 한나라다.

진시황 병마용은 인류 최고의 유물 중 하나지만 가장 최악의 발굴 실패 사례로도 꼽힌다. 지금 관람객들이 보는 병마용은 그냥 흙색인데 원래는 달랐다고 한다. 도기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각종 색깔로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땅속에 묻혀 있다 발굴된 후 공기에 노출되자마자 색깔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색소가 산화됐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토용 제작 당시에는 채색 후 옻칠로 마감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 습기를 머금은 토양 속에 보관된 토용은 발굴 후 곧바로 시안 지역의 건조한 공기와 접촉했다. 이에 옻칠 코팅층이 마르며 채색층과 함께 작은 알갱이로 수축됐고 이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색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 발견된 몇몇만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 막바지 혼란 상황에서 벌어진 발굴 과정의 대참사였다. 추가 발굴은 신중에 신중을 더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 당국의 설명이다.

관람객 가운데 일부는 병마용이 생각보다 덜 감동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는 그동안 중국 당국의 홍보가 너무 심해 사람들이 2,000년 전 고대유물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중국답게 박물관 주위에는 병마용의 복제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한데 이를 보고 왔다면 진짜 병마용도 어쩐지 영화 촬영을 위한 모조품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병마용은 역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시안 시내에는 병마용 박물관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방문객은 택시를 타면 편한데 한화로 2만~3만원을 주면 시내에서 박물관 입구까지 갈 수 있다. 물론 박물관 구역 안은 항상 붐비기 때문에 오랜 기다림 등 단단한 각오를 하는 것이 좋다.
/글·사진(시안)=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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