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바이든은 누구...진보적 경제가치 존중 속 자유민주주의 다자주의 전통 수호 [미 대선 바이든 승리]

진보적 경제가치 존중 속 자유민주주의 다자주의 전통 수호

두 아들이 입원한 병상에서 상원의원 취임 선서하는 조 바이든  *****출처:게티이미지뱅크******두 아들이 입원한 병상에서 상원의원 취임 선서하는 조 바이든 *****출처:게티이미지뱅크******




델라웨어대 재학 중 조 바이든./조 바이든 공식 홈페이지 캡처델라웨어대 재학 중 조 바이든./조 바이든 공식 홈페이지 캡처


2010년 대학 농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조 바이든과 차남 헌터./EPA연합뉴스2010년 대학 농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조 바이든과 차남 헌터./EPA연합뉴스


조 바이든과 두번째 부인 질 바이든.조 바이든과 두번째 부인 질 바이든.


2017년 1월 12일 조 바이든 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최고 영예의 훈장인 ‘자유 훈장’을 수여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2017년 1월 12일 조 바이든 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최고 영예의 훈장인 ‘자유 훈장’을 수여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2년 백악관에서 함께 사진 촬영을 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2012년 백악관에서 함께 사진 촬영을 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


2009년 1월 20일 조 바이든이 존 폴 스티븐슨 대법관 주관으로 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2009년 1월 20일 조 바이든이 존 폴 스티븐슨 대법관 주관으로 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2008년 8월 2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선 후보가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조 바이든과 공개석상에 처음 모습을 보이며 공동 유세를 벌이고 있다.2008년 8월 2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선 후보가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조 바이든과 공개석상에 처음 모습을 보이며 공동 유세를 벌이고 있다.


1965 델라웨어대 졸업앨범 속 바이든1965 델라웨어대 졸업앨범 속 바이든


1953년 10살 조 바이든1953년 10살 조 바이든


2015년 뇌종양으로 숨진 장남 보 바이든과 두번째 부인 질 바이든./조 바이든 공식 홈페이지 캡처2015년 뇌종양으로 숨진 장남 보 바이든과 두번째 부인 질 바이든./조 바이든 공식 홈페이지 캡처


2017년 1월 12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은 조 바이든 전 부통령./조 바이든 공식 홈페이지 캡처2017년 1월 12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은 조 바이든 전 부통령./조 바이든 공식 홈페이지 캡처


“나는 편의보다 지적 동의와 개인적 원칙을 우선으로 삼는 바람에 힘든 길을 걸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에서 나는 내 직감을 믿으며, 어느 한쪽 편에 서기 어렵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는다.”


조 바이든이 자서전 ‘지켜야 할 약속’에서 밝힌 그의 신념의 한 대목이다. 바이든은 평생 특정 이념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당대의 여론과 현실에 충실히 따르는 행보를 보여왔다. 이 같은 현실주의 흐름에서도 그는 50년 정치 여정 속에서 전통 민주주의 가치와 다자주의 원칙을 지켜왔다. 대권 도전 3수만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넘어 그가 차기 대통령 자리에 한 발 더 성큼 다가서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숱한 아픔의 가정사와 실패 극복으로 이어지는 그의 50년 정치 인생에서 그가 지켜냈던 전통 자유민주주의, 다자주의, 진보적 경제가치를 수용하는 포용적 경제 철학은 힘을 기반으로 한 일방적 패권주의, 독불장군식 정치 스타일의 트럼프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반세기 정치 행보 속에서 그가 지켜낸 전통 민주주의 원칙은 그를 제46대 미국 대통령 자리에 바짝 다가서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말더듬증 딛고 고교 졸업연설=바이든은 1942년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아버지 조지프 로비넷 바이든 시니어와 어머니 캐서린 바이든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자 1952년 가족과 함께 훗날 자신의 정치 기반이 된 델라웨어주로 이사했다. 바이든은 청소와 중고차 판매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아버지에게서 성실함과 포기를 모르는 의지를 배운다. 집단 따돌림의 이유였던 말더듬증도 아버지의 방식으로 극복했다. 매일 아침 제일 먼저 학교로 나가 스피치 연설을 했고, 결국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단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고 연설을 해냈다. ◇왕복 4시간 기차 출퇴근한 싱글 대디=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연설에 감명받는 그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 ‘정치등용문’ 로스쿨에 진학한다. 로스쿨 재학 중 첫 번째 아내 닐리아 헌터를 만나 결혼한 뒤 1972년 공화당 거물이었던 케일럽 보그스를 누르고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역대 여섯 번째 최연소 상원의원의 탄생이었다.

관련기사



하지만 공식 취임 직전 그는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었다. 두 아들은 사고로 크게 다쳤다. 바이든은 당시 큰 충격에 “깨진 유리 파편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취임 포기까지 생각했던 그는 동료들의 설득에 마음을 다잡고, 두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상원의원 취임선서를 한다. .

◇대선 잠룡이었지만 중도하차=1977년 현재의 아내인 질 제이콥스와 결혼한 바이든은 10년 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3개월 만에 사퇴한다. 연설문 표절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는 뇌동맥류가 발견돼 목숨을 건 수술을 두 차례나 받는다.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바이든의 정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약 1년 만에 정계로 복귀해 활약한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001년과 2007년 상원 외교위원장에 오르며 워싱턴의 대표적인 외교통으로 자리매김한다. 바이든은 기세를 몰아 다시 한 번 2008년 대선을 위해 당내 출마를 선언한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등 쟁쟁한 경쟁자들에게 밀려 결국 또 중도 하차하게 된다.

◇오바마와의 브로맨스=굵직한 경력에도 속절없이 무너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오바마였다. 그는 짧은 정치 경험과 적은 외교 활동이라는 자신을 단점을 보완해줄 러닝메이트로 바이든을 지명한다. 그렇게 바이든은 오바마의 손을 잡고 대선 운동에 나섰고, 부통령으로서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다. 바이든은 훗날 당시 오바마의 도움에 감사해 하며 “오바마는 단순한 상사나 친구 이상으로 보의 죽음을 겪었다”며 그를 “또 다른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8년 간 부통령 자리를 지킨 바이든은 노고를 인정받아 2017년 미국 최고 영예 훈장인 ‘자유훈장’을 받는다.

◇극복해야 할 과거사도=백악관이 눈앞에 보이지만 그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과거사도 있다. 성추행 의혹과 아들 헌터가 연루된 우크라이나 의혹이다. 4월 바이든이 사실상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자 바이든 상원의원실에서 근무했던 한 여성이 바이든으로부터 성추행은 물론 한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바이든 측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도 “진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며 반박했지만 의혹은 말끔하게 풀리지 않은 상태다. 지난달 뉴욕포스트는 우크라이나 에너지기업 부리스마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던 아들 헌터가 다른 임원의 청탁을 받고 당시 부통령으로 있던 부친에게 로비를 주선했다고 보도했다.

/곽윤아기자 ori@sedaily.com

홍병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