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방문 중인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10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를 만나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이은 새 한일 공동선언을 제안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11일 보도했다. 하지만 스가 총리는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언론들은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박 원장이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함께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같은 ‘문재인·스가 선언’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측의 사과 표명과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 발전에 대한 내용을 담은 선언이다.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를 향한 양국 국민의 협력을 언급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박 원장이 새 한일 공동선언에 내년 7월 개최될 예정인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의 성공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그러면서 “일본 정부 관계자가 선언에 의해 한일 간의 현안이 해결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현실적이지 않다”며 박 원장의 제안을 평가절하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아사히신문도 “일본 고위관계자가 ‘전 징용공(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의 일본식 표현)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새 한일 공동선언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 역시 “스가 총리가 ‘징용 문제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양국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는 계기를 한국 측이 만들라’고 박 원장에게 다시 요구했다”며 “현시점에서는 새로운 선언의 검토에 난색을 보인 형태”라고 진단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위배된다며 한국 측에 해결책을 제시하라던 기존 입장을 되풀이한 반응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며 관련 보도를 부정했다. 가토 장관은 전날 박 원장의 스가 총리 예방과 관련해 “총리는 북한 대응을 비롯한 한일·한미일의 협력은 불가결하다는 취지로 말한 뒤 ‘구 한반도 출신 노동자(일제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 등으로 매우 엄중한 상황에 있는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는 계기를 한국 측이 만들 것을 재차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박 원장은 이에 국내의 한 언론을 통해 “(일본 언론이) 사실대로 썼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다만 우리 정부가 연말 서울 개최를 추진하고 있는 한중일 정상회담을 거론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앞서 일본 언론들은 스가 총리가 한중일 정상회담에 불참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지난 8일 일본을 방문한 박 원장은 첫날 자민당 2인자인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을 만난 데 이어 9일에는 기타무라 시게루 국가안전보장국장, 다키자와 히로아키 내각정보조사관을 각각 만났다. 10일에는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과 면담한 뒤 스가 총리를 예방했다. 박 원장의 방문은 스가 내각 출범 후 한국 고위급의 첫 방일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