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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정치·경제·문화를 갈라놓은 인류 장벽의 역사

■장벽의 문명사-데이비드 프라이 지음, 민음사 펴냄

장벽 세우고 고대문명 꽃피웠으나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커져

불법이민·질병·테러 차단 위해

21세기 들어 다시 장벽 건설 붐

세계화 시대 근본적 해결책 안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23일(현지시간) 아리조나 산 루이스에서 로드니 스콧 국경 수비대장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23일(현지시간) 아리조나 산 루이스에서 로드니 스콧 국경 수비대장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저분한 선거의 후유증은 예상대로 크다. 불복에 소송까지 막대한 진통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승자는 분명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게 축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세간의 관심사도 다음 단계로 이동 중이다. 현직 대통령이자 패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남긴 정치적 족적의 존속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트럼프 정부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크고 아름다운 장벽’이다. 애초 멕시코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강조됐던 ‘장벽’은 지난 4년 동안 트럼프 정부의 정체성과 동의어가 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승자는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임자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쪽을 택한다. 그렇다면 이제 장벽은 철거될 것인가.

중국 만리장성./신화통신연합뉴스중국 만리장성./신화통신연합뉴스


역사학자 데이비드 프라이의 저서 ‘장벽의 문명사(민음사 펴냄)’를 보면 바이든 시대에도 장벽이 철거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장벽은 미국 땅에서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클린턴, 부시, 오바마 정부도 애써 ‘담장’이라 낮춰 불렀을 뿐 국경을 따라 온갖 모양의 벽을 세웠다.


더 나아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장벽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 쌓여 왔다.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 때문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장벽이 주목받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길고 거대한 장벽들이 점점 더 높이, 더 길게 들어서고 있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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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역사가 진보해도 사라지지 않는 장벽의 존재 이유를 알기 위해 저자는 수천 년 인류 문명사를 들여다봤다. 4,000여 년 전 고대 시리아의 장벽에서 출발해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중국, 로마, 몽골, 아프가니스탄, 미시시피 강 하류,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오늘날 미국-멕시코 국경까지 시간 여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장벽에 양면성, 즉 안정을 보장하는 폐쇄성과 교류를 촉진하는 개방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알아냈다.

프라이는 “장벽이 없었다면 중국의 학자도,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도, 그리스의 철학자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어떤 발명도 문명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벽보다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류는 안전한 벽 안에서 학문과 미술, 과학의 꽃을 피웠다. 한편으로 무기를 내려놓고 군사 훈련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벽 안의 사람들은 유약해졌고, 외부에 대한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됐다. 공포에 질린 자들은 더 높고 단단한 벽을 세우기로 했고, 벽돌을 굽고 쌓는 일을 떠맡았던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벽이 높아질수록 바깥세상에서는 도전과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난공불락’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 서로 다른 집단의 교류가 발생했다.

2016년 헝가리 정부가 부다페스트 동쪽 국경에 세운 180㎞의 철제 울타리./EPA연합뉴스2016년 헝가리 정부가 부다페스트 동쪽 국경에 세운 180㎞의 철제 울타리./EPA연합뉴스


2018년 8월 이스라엘 정부가 설치한 가자 지구 분리 장벽 앞으로 한 가족이 걸어가고 있다./EPA연합뉴스2018년 8월 이스라엘 정부가 설치한 가자 지구 분리 장벽 앞으로 한 가족이 걸어가고 있다./EPA연합뉴스


전통적 장벽의 존재 가치가 떨어진 건 대포의 등장 이후다. 아무리 견고하게 쌓은 장벽이라도 대포 한 방에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21세기 들어 장벽은 오히려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은 듯하다. 인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케냐, 튀니지, 리비아, 에콰도르 등에서 새로운 장벽이 솟아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장벽으로 봉쇄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과의 접경에 1,770㎞ 장벽을, 케냐는 소말리아 접경에 700㎞에 달하는 장벽을 세웠다. 헝가리, 터키, 불가리아, 그리스 등지도 마찬가지다. 불법 이민, 질병, 테러 등에 대한 두려움이 새로운 장벽 건설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게 세워진 장벽은 언뜻 보면 유효한 듯하다. 헝가리가 장벽을 세운 이래 하루 1만 명이던 이주민 수는 40명 선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장벽은 부담의 자리만 옮겨 놨을 뿐이다. 세계화된 오늘날, 장벽은 결코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그러했듯이 장벽을 높이 세우면 당장은 안전할 수 있지만 장벽 너머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진다. 난공불락의 장벽은 사라졌다지만 장벽의 양면성은 여전히 견고하다. 2만원.




정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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