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역 인근에서 남편과 함께 40년 가까이 도장을 만들어 판매해온 김모(68)씨는 최근 일을 그만둘지 고민하고 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인장(印章) 업계인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며 매출에 직격탄을 맞은 탓이다. 서울경제와 12일 만난 김씨는 “올해도 인근 도장 가게 2곳이 없어졌다”며 “경제가 어려우니 사업계약 등이 많이 줄면서 도장이 전혀 팔리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사양길에 접어든 인장 산업이 결국 코로나19 사태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됐다. 관공서나 금융권 등 그나마 도장이 필요했던 곳들도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도장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비대면활동 증가와 생체인증기술 도입 등으로 도장의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재료와 수작업을 통해 돌파구를 찾던 도장 장인들도 특히 올해는 매출 감소가 크다며 힘겨워하는 실정이다.
김씨의 가게가 있는 ‘인장의 거리’에는 십수년 전만 해도 곳곳에 도장 업체가 많았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는 옷가게·음식점·편의점 등 일반 소매업종이 대부분이다. 지난 1999년 도장 제작에 정부 허가가 필요한 인장업법이 폐지되고 2000년대 들어 컴퓨터 도장 제작 및 서명거래 일반화, 공인인증서 도입 등을 거치며 줄곧 사양산업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인장업연합회에 따르면 1996년 6,723명이던 인장협회 회원은 2002년 4,992명, 2008년 2,910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지금은 약 1,500명 수준이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비대면 업무가 활성화되면서 각종 업계에 QR코드 인증은 물론 생체인증 도입 바람까지 불어 더욱 영업이 어려워졌다. 40년 넘게 수작업 도장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홍모씨는 “사람들이 도장을 많이 안 찾는 것을 감안해도 올해는 하루에 2~3개밖에 못 만들고 있다”며 “그나마 인감도장 같은 경우 많이들 잃어버리니 또 만들어주고 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전 도소매업종이 힘든 상황에서 수십년간 도장을 조각해온 이들이 갈 곳은 마땅찮다. 인장의 거리에서 30년 넘게 도장을 만든 유모씨는 “일을 접으려고 하고 있지만 마땅히 다른 할 일이 없다”며 “이제 다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도장을 기계로 제작해 대량판매하는 임모(58)씨는 “지난해부터 일을 시작했다. 퇴직하고 나서 기술은 없고 음식점도 힘들어 보여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며 “외판업자를 통해 학교 등에 납품하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외판업자들의 출입이 막혀 매출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인감·법인 도장 위조 방지 목적을 근거로 인장업법을 부활시켜달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사문서 위조 등은 현행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한데다 ‘도장의 천국’으로 불리는 일본마저 올해부터 관공서 디지털화를 추진하면서 ‘탈도장’ 바람이 불고 있다.
도장 산업을 전통산업으로 보고 고급화해 보호·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인사동에서는 서예가들이 예술성을 가미해 제작한 도장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부 도장 명장들은 단골을 바탕으로 꾸준히 수익을 올리고 있다. 서예가 출신 도장 장인인 신화식씨는 “많은 인장업자가 금석학과 서체 등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며 “공부를 하고 전문성을 키워야 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글·사진=방진혁기자 bread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