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대화로 목숨 구하는 경찰…“비결은 첫째도 둘째도 공감과 인내”

[이웃집 경찰관] 이상경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

대학서 심리학 전공…사람 설득하는 매력 느껴

수십 건의 인질·자살기도사건 협상팀으로 참여

“섣불리 접근 말고 공감하며 대화하는 게 중요”

손예진 주연 영화 ‘협상’ 시나리오 작업 참여도

“눈 앞에서 생명 구하는 건 바꿀 수 없는 보람”

위기협상전문요원으로 활동 중인 이상경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 /이호재기자위기협상전문요원으로 활동 중인 이상경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 /이호재기자



지난 9월 한 50대 남성이 휘발유 통을 들고 서울 양화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수십 대의 경찰·소방차와 구급차가 다리 위를 빼곡히 차지했고, 도로 위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에어매트가 깔리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찔한 상황 속에 서슴없이 아치 위로 성큼성큼 올라가는 이들이 있었다. ‘위기협상’이라는 문구가 적힌 재킷을 입은 경찰관들은 농성 중인 남성을 물리력으로 제압하는 대신 마주 앉은 채 대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6시간에 걸친 끈질긴 설득 끝에 남성은 농성을 풀고 무사히 아치 위를 내려왔고, 사건도 종료됐다.

서울경제가 만난 이상경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는 그날 아치 위 협상에 참여했던 경찰관 중 한 명이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대학원에서 범죄수사법학을 전공한 그는 2008년 프로파일러(범죄분석요원) 특채로 경찰에 입직한 뒤 2012년 위기협상교육을 받았다. 이 경사는 “교육을 받으면서 경찰업무 중 ‘협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며 “경찰이 제압이나 진압뿐 아니라 대화로 사람을 설득하는 업무를 한다는 게 새로웠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에는 약 400명의 경찰이 위기협상요원으로 활동 중이다.

평상시에는 각자 소속된 곳에서 맡은 업무를 하다가 협상이 필요한 사건이 발생하면 출동하는 방식의 비상설직무라 해도 위기협상요원의 역할은 지대하다. 대화만으로도 한 사람의 안전은 물론 생명까지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살기도사건이나 인질극, 테러상황의 희생자 대부분은 무력진압 중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명을 구한다는 관점에서는 강제적 진압보다 협상이 훨씬 효과적인 셈이다.

지난 9월 22일 서울 양화대교 위에서 투신 소동을 벌이던 남성을 설득하기 위해 이상경(오른쪽 두번째)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가 위기협상팀 동료들과 함께 대화를 걸며 설득하고 있다./연합뉴스지난 9월 22일 서울 양화대교 위에서 투신 소동을 벌이던 남성을 설득하기 위해 이상경(오른쪽 두번째)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가 위기협상팀 동료들과 함께 대화를 걸며 설득하고 있다./연합뉴스


2014년 서울 강남의 한 제과점에서 정신질환자가 칼을 들고 벌인 인질극은 이 경사에게 협상의 효과를 몸소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됐다. 그는 “그 전까지는 대테러협상요원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수사부 소속으로 일반적인 위기협상 사건에 출동한 것은 2014년이 처음이었다”며 “당시 협상팀이 칼을 들고 있는 정신질환자를 대화로 설득해 인질을 풀어주도록 유도하고, 칼까지 내려놓게 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로 이 경사는 지금까지 40건이 넘는 협상 사건을 처리해왔다.


프로파일링과 협상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경력 덕분에 이 경사는 배우 손예진과 현빈이 각각 경찰과 테러리스트로 출연한 영화 ‘협상’의 시나리오 작업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속 캐릭터들의 스릴 있는 대화와 능숙한 설득이 돋보이는 영화와 다르게 실제 협상은 ‘적극적으로 듣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이 이 경사의 설명이다. 이 경사는 “출동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자’(협상 대상자를 지칭하는 용어)의 행동을 변화시키려고 섣불리 접근하지 않는 것”이라며 “힘들었던 감정에 공감해주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라포’(rapport·면담자와 피면담자 간 친밀감)가 생기고, 그때 위기자가 비로소 행동을 바꿀 마음이 생긴다. 이런 방식으로 임하면 정신질환자와도 대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위기협상 이론에서는 이를 ‘적극적 청취 기법’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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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협상전문요원으로 활동 중인 이상경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 /이호재기자위기협상전문요원으로 활동 중인 이상경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과 경사. /이호재기자


물론 협상이 대상자와 경찰의 1대1 대화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주협상관이 대화에 임하는 동안 함께 출동한 보조협상관은 대상자의 반응을 면밀히 살펴보며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판단한다. 예컨대 목소리 톤이 낮아지고, 말 속도가 느려지고, 반말을 하다가 존댓말을 쓰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반면 대상자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거나,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할 때는 재빨리 주의를 끌어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지 않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 경사는 “부정적인 지표가 보일 때면 그야말로 심장이 쿵쿵 뛰고 극도로 예민해진다”며 “나는 겪어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위기자가 눈 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경찰들은 굉장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협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성공적인 협상 끝에는 언제나 ‘즉각적인 보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사는 “프로파일링은 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반면 협상은 잘하면 눈 앞에서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이 경사는 아들과 다툰 뒤 집안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끝내 아들과 화해하도록 만들었고, 스스로 삶을 등지려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위기협상요원들이 매번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협상에 나서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이 경사는 오늘도 언제 출동할지 모를 사건 현장을 앞두고 스스로 되뇐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을 포기해준다는 것 자체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라고.

김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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