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미술품 물납제' 도입 미뤄선 안된다

정준모 문화정책·미술평론가

정준모 문화정책·미술비평가,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정준모 문화정책·미술비평가,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영화 ‘배트맨 비긴즈’의 주인공 브루스 웨인이 사는 성은 멋지고 웅장하지만 실은 컴퓨터그래픽(CG)이다. 실제는 ‘황성옛터’의 ‘월색만 고요한 폐허’나 다름없는 성이다. 19세기 말 세계 최고 부자였던 로스차일드가가 지난 1852년 건립한 멘트모어 성이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장인 크리스털 팰리스를 설계한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의 작품으로 전형적인 빅토리아 양식의 건축물이다. 부호인 동시에 방대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수집했던 대 컬렉터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35개 이상의 방을 갖췄다. 상당히 견고해 2차 세계대전 당시 국립미술관의 소장품은 물론 영국 황실의 보물들이 피난을 올 정도였다. 약 60만평의 대지에 공원과 정원을 갖춘 이곳은 외관도 여느 성보다 웅장했지만 실내에는 귀중한 문화재와 미술품·공예품으로 장식돼 ‘메디치가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영원한 부는 없는 법, 영지는 1940년대 2개의 18홀짜리 골프장이 됐다. 1974년 로즈베리 백작 6세가 사망한 후 200만 파운드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상속인은 1896년 영국 정부가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있는 부동산과 문화재·미술품의 국외 반출을 막고 국가 소유로서 국민 모두의 문화재로 보존 관리하고자 만든 ‘물납’, 즉 ‘대물변제’를 통해 상속세를 해결하려 했다. 또 V&A박물관은 건축과 미술 공예품의 보고인 성을 국가가 소유해 빅토리아 시대를 상징하는 미술관으로 운영하려 했다.


성과 내부의 컬렉션을 유지하기 위해 멘트모어 성 매각에 반대하는 시민운동도 있었지만 정부는 세수 부족을 이유로 ‘물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세기의 매각’을 통해 건물과 미술·공예품들은 일주일 동안 세금의 3배인 600만 파운드의 가격에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성은 인도 명상가인 마하리시의 재단이 매입해 재단본부로 사용하다 2000년 6성급 호텔로 개조하려는 시리아 출신 부동산 업자 시몬 할라비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화유적을 호텔로 바꾸는 것을 반대하는 시민과 새 소유주의 재정난으로 성은 방치되면서 기둥이 틀어지고 비틀린 쇠락한 ‘황성옛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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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영국은 이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1980년 ‘국립 문화유산법’을, 1983년에는 물납으로 인한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1,000만 파운드의 준비금을 마련했지만 문화유산 보존에 한계가 있어 평소에 문화재 미술품을 기증해 각종 세금감면을 받을 수 있는 ‘문화기증제도’를 도입했다. 오늘날의 ‘창조적 영국’은 120년 전부터 준비해온 성과다.

개발을 이유로 많은 문화재를 버린 우리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언제까지 민간에 맡겨놓을 수 없는 일이다. 연간 30억원에 불과한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의 예산으로 문화재를 소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직도 개발도상국형 직접지원을 통한 문화정책을 고수해야 하나. 국가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획기적이며 혁신적인 문화재 미술품 ‘물납’ 제도, ‘문화기증제도’의 도입을 통해 생계형 복지국가에서 선진적인 보편적 문화복지국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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