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에 K팝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후보에 올랐다. 일각에서 거론됐던 ‘올해의 레코드’ 등 이른바 ‘4대 본상’ 은 아니지만,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뮤지션이 그래미 어워즈에서 순수 대중음악 분야의 후보에 오른 것은 62년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상의 권위만큼이나 미국 대중음악계의 백인 중심 보수성을 대변하는 그래미 어워즈의 벽을 BTS가 넘어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래미 어워즈를 주관하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는 24일(현지시간) 온라인 라이브 방송을 통해 내년 1월31일 열리는 제63회 시상식의 후보들을 발표했다. 총 84개 부문 중에서 BTS는 지난 8월 발표한 ‘다이너마이트’로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Best Pop Duo/Group Performance) 후보에 포함됐다.
이 상은 팝 장르의 세부 시상 부문 중 하나로,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보인 듀오나 그룹, 컬래버레이션 작품에 준다. 함께 후보에 오른 뮤지션들만 해도 ‘Exile’의 테일러 스위프트, ‘Rain On Me’를 합작한 레이디 가가·아리아나 그란데, ‘Un Dia’에 참여한 영국 뮤지션 두아 리파 등 쟁쟁하다. 팝 부문은 대표적인 미국 주류 음악 장르라 경쟁도 치열할 뿐 아니라 보수적이고 인종적 위계가 심하다는 점에서, 미국에서 데뷔하지도 않은 BTS의 후보 진입은 K팝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BTS는 이로써 빌보드 뮤직 어워드,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 이어 그래미 어워즈까지 미국의 3대 주요 음악시상식에 모두 후보에 오르게 됐다. 당초 기대를 모았던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앨범’ 등 4대 본상 후보로 올라가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래미 어워즈가 여타 음악 시상식들에 비해 심사위원들의 보수성이 가장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충분히 크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는 “그래미 어워즈는 영미권이라도 메이저 음반사 소속이 아닌 인디 뮤지션이면 고배를 마시는 일이 흔할 정도”라며 “비록 본상 후보는 아니지만 미국인도, 메이저 소속도 아닌 BTS가 후보에 올랐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김영대 대중음악평론가는 “BTS가 꾸준히 그래미 어워즈 측과 신뢰를 쌓아 온 과정이 중요했다고 본다”며 “단순히 K팝 바이럴 스타라고 후보에 올리지 않는다. 그간 쌓은 신뢰가 히트곡 ‘다이너마이트’를 만나 모멘텀을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BTS는 앞서 2018년 그래미 뮤지엄과 단독인터뷰를 한 데 이어 2019년에는 시상자로 나서고 올 2월 시상식에서는 공연까지 하는 등 그래미 무대와 인연을 이어 왔다.
레코딩 아카데미에 따르면 그래미 어워즈는 미국 내 가수, 작곡가, 프로듀서 등 다양한 음악산업 종사자들의 투표에 따라 수상자가 정해진다. 투표권을 갖는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 메이저 음반사들이 주도하는 미국음반저작권협회(RIAA) 소속으로, 이 때문에 상의 권위에 비해 백인 메이저 뮤지션에 대한 편애가 두드러진다는 비판이 거세다. 지난 2017년 비욘세의 ‘레모네이드’ 앨범이 여러 비평매체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뽑혔음에도 그래미에서는 아델의 ‘25’ 앨범에 밀렸던 게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켄드릭 라마, 칸예 웨스트 등 많은 흑인음악 뮤지션들이 엄청난 음악적 성취에도 본상을 타지 못했다.
한국 음악계도 수 차례 그래미 어워즈와 인연을 맺어 왔으나, 미국 메이저 아티스트와의 경쟁이 없는 클래식, 국악 등의 부문에 국한됐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1993년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와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으로 클래식 오페라 부문 최고 음반상을 받았고, 음반 엔지니어 황병준 사운드미러코리아 대표는 2012년 클래식 부문 최고 기술상을, 2016년 ‘최우수 합창 퍼포먼스’ 상을 받은 바 있다. 국악 음반 ‘정가악회 풍류 가곡’도 2012년 월드뮤직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 때문에 방탄소년단이 후보 지명을 넘어 내년 시상식에서 실제 그래미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면 BTS는 K팝 역사는 물론 그래미 역사에도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BTS의 그동안의 활동과 미국 시장에서의 경쟁력, 화제성 등을 고려하면 수상을 충분히 기대해볼 만하지만, 그래미가 대표하는 미국 주류 음악계의 강한 보수성이 어떤 결정을 내릴 지는 속단하기는 어렵다.
BTS는 25일 소속사 빅히트(352820)를 통해 “후보에 오르니 수상 욕심도 생기고 기대된다”며 “노력의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고 밝혔다. RM·뷔·지민·정국 등 일부 멤버들은 트위터를 통해 이날 새벽 후보 발표 생중계 장면을 직접 시청하며 감격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한편 이번 그래미 어워즈 시상식에선 비욘세가 지난 8월 발표한 싱글 ‘Black Parade’로 ‘올해의 레코드’ 후보에 오르는 등 9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 두아 리파는 ‘올해의 앨범’ 등 7개 부문에, 테일러 스위프트는 6개 부문의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시상식에서 4대 본상을 휩쓴 빌리 아일리시도 ‘올해의 레코드’ 후보가 되는 등 여성 뮤지션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히트곡 ‘Blinding Lights’로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위켄드는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