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부터 금융 당국은 보험료 산정 시 사용되던 위험률 조정 한도와 보험 상품 가격의 획일성을 조장했던 표준 이율을 완전히 폐지했다. 보험 산업 경쟁력 강화 로드맵에 따라 이른바 보험료 자율화가 이뤄진 게 이때다. 그러나 국민 3,400만 명이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 의료보험에 대한 가격통제는 이듬해 슬그머니 부활했다. 2017년 건보의 보장성 강화 정책, 이른바 ‘문재인 케어’가 시행되면서부터다.
보건복지부·금융위원회 등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실손 보험의 반사이익 산출을 의뢰해 매년 도출된 반사이익 폭을 실손 보험 요율에 반영하도록 했다. 2017년 말에는 반사이익 규모가 산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험료 인상을 유보하도록 했다. 121.3%의 손해율로 1조 3,268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보험사들은 결국 보험료를 동결했다. 이듬해 정부는 KDI가 산출한 6.15%의 반사이익 부분을 차감해 보험료를 조정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2009년 10월까지 판매한 구실손과 2017년 3월까지 판매한 표준화 실손의 보험료 인상 폭이 6~7% 수준으로 제한됐고 3차 실손 보험 제도 개편을 통해 탄생한 신실손(착한실손)은 6.5~7% 수준의 보험료를 인하했다.
100원의 위험보험료를 고객에게서 받아도 120원 이상의 보험금을 내주는 만성 적자 상품의 가격을 정부가 통제한 결과는 이듬해부터 뚜렷하게 나타났다. 2019년 손해율이 133.9%로 뛰어오른 동시에 2조 7,869억 원의 손실이 발생하며 사상 최대 수준의 적자를 낸 것. 보험사들은 비급여 항목이 급여화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비급여 진료가 생겨났기 때문이라며 반사이익이 아닌 풍선 효과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올 초 실손 보험 요율 조정 과정에서도 정부는 실손 보험료 인상률을 한 자릿수로 맞추라는 무언의 압박을 이어갔다. 이에 따라 손해율이 140%대까지 치솟은 구실손과 표준화 실손은 당초 인상 목표치(15~20%)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9%대로 가격 인상 폭을 낮췄고 지난해부터 적자로 돌아선 착한실손마저 9.8%가량 보험료를 인하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의료 이용량이 크게 줄면서 보험 업계는 실손 손해율이 큰 폭으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올 3·4분기 누적 손해율은 130%로 지난해와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계절적 요인으로 연말로 갈수록 손해율이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해 업계가 내놓은 올해 예상 손해율은 131.4%로 코로나19에 따른 반사이익은 사실상 미미한 수준이다. 정부의 통제 영역 밖에 있는 비급여 진료가 늘어난 데 따른 풍선 효과가 주된 원인이지만 적정 수준의 보험료 인상만 이뤄지더라도 매년 5,000억 원 안팎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보험 가입자가 납입하는 보험료 총액과 보험사가 지급하는 보험금의 총액이 같도록 해 보험사와 가입자 모두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수지 상등의 보험원리에 맞게 정상적으로 요율을 조정했을 경우 보험 업계는 3년간 실손 보험의 적자 규모를 최소 1조 1,000억 원가량 줄일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의 가격 규제 속에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실손 적자 규모는 사상치 경신을 앞둔 상황이다.
공적 보험의 보장 강화 속도를 뛰어넘는 비급여 진료비 증가 추세에 공·사보험 모두 심각한 부작용을 앓고 있다. 2017년 62.7%였던 건보 보장률은 2018년 63.8%로 찔끔 개선되는 데 그쳐 대통령 임기 내 목표(70%) 달성은 요원하다. 그런데도 건보 재정은 올 상반기에만 1조 2,814억 원 적자를 내며 연간 4조 원대 적자가 확실시된다. 실손 보험 역시 내년에도 적정 수준의 가격 인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적자 규모가 3조 원대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9일 금융위는 의료 이용량에 따라 보험료를 할인·할증하는 4세대 실손 보험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매년 급증하는 비급여 진료비 청구에 대응하기 위한 상품 구조 개편이지만 보험 업계는 근본적으로 실손 보험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려면 비급여 진료에 대한 통제와 가격 자율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장기간 손실이 누적되면서 보험사들은 실손 보험의 가입 문턱을 높이며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최근 10년간 11개 보험사가 실손 보험 판매를 중단했다. 또 삼성생명·한화생명·동양생명 등 주요 보험사들이 올 들어 실손 가입 가능 연령을 대폭 낮췄고 주요 손보사들은 장년층에게만 적용했던 방문 진단 심사를 40대 가입자에게까지 의무화했다.
보험 업계 관계자는 “문케어 시행 이후 과잉 진료와 의료 쇼핑에 따른 보험금 누수가 커지고 있는데 정부는 보험료 인상 요인을 반영하지 못하도록 고삐를 죄고 있다”며 “매년 조 단위 손실이 누적된다면 미래 특정 시점에 보험료 폭등이 불가피해지는데 이 경우 대다수의 선량한 가입자만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