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수소 용광로' 전환 땐 투자·매몰비용만 110조…"기업현실 무시"

[전방위 규제에 벼랑끝 기업들]

<하> '과속 탄소중립'에 우는 철강·정유

정부, 실험실서나 논의되는 '천지개벽 수준 기술' 요구

국내 설비 여건·생산량 고려않고 선진국 따라잡기 급급

'백년대계' 에너지 계획과도 안맞아…기업과 소통 절실

1515A15 업종별탄소배출량



기업현실을 무시한 ‘과속 탄소중립’ 정책에 기업들의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의 기둥인 철강과 정유화학 업체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가 최근 2050년까지 실질적 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자는 ‘아득한’ 목표를 들고 나오면서다. 친환경 시대의 흐름에 맞게 화석 연료 대신 신재생에너지를 주요 에너지 공급원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이지만, 업계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직 실험실에서나 논의되는 기술 적용을 가정해 급진적인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에너지 업계는 숙의를 거쳐 확정한 국가 ‘백년대계’인 에너지 계획의 틀마저 흔들릴까 우려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가 에너지 구조를 개조하는 ‘천지개벽’ 수준의 계획을 세우면서 민간과 충분한 논의가 없었다”며 “지금이라도 정부가 구체적인 실행 계획에서 기업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철강·정유 기업들 “기술은 걸음마 수준인데...”




최근 발표된 정부의 탄소중립 전략에 따르면 업종별로 철강 산업은 제철소 용광로를 코크스가 아닌 수소로 돌린다는 계획이다. 석유화학 산업에서는 나프타를 바이오 혹은 수소에 이산화탄소(CO2)를 결합한 원료로 대체한다. 정유 산업은 연료를 전환하고 이산화탄소를 회수하는 신기술을 적용한다. 이같은 기술들로 줄일 수 없는 탄소에 대해서는 이산화탄소 포집·저장·활용(CCUS) 기술을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정부가 철강업계에 ‘전략’으로 내민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걸음마’ 수준이라는게 업계의 시각이다. 상용화 시기가 아직 불투명하다. 일찌감치 연구에 나섰던 독일·스웨덴 등 유럽 선진국들은 이 기술의 상용화에 20~30여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 지원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철강 업체들이 수소 환원 방식의 전기로로 전환하려면 기존 용광로(고로)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공정 전체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매몰비용이 발생한다. 남정임 철강협회 기술환경실장은 “우리나라 고로 철강 업체들이 수소 환원 방식의 전기로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투자와 매몰 비용은 110조 원에 달할 것”이라며 “무리하게 추진하다가는 공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탄소누출’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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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해외 철강 산업의 구조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은 저탄소화 목표는 설득력이 약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철강 산업 역사가 긴 유럽은 설비가 낡고 조강생산량이 한국보다 적어 공정 전환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다. 반면 한국의 조강생산량은 세계 5위 수준으로 시설도 최근에 지어진 편에 속한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조업의 위상이 약한 유럽의 전략을 뒤쫓는 것을 반복하기보다는 국내 산업 발전의 전망과 경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시로 바뀌는 에너지 정책에 기업만 골탕



에너지 업계는 탄소중립 선언이 지난해 6월 확정된 ‘제3차 에너지 기본계획’의 틀을 흔들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부는 그간 20년을 계획기간으로 두고 5년마다 에너지 기본계획을 수립해 에너지원별 수요와 공급을 관리하는 기본적인 체계로 활용해 왔다. 업계는 탄소중립 2050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갓 1년이 지난 에너지 기본계획을 원점에서 고민해야 할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발전설비 운영계획의 기본 틀이 되는 에너지 기본계획을 믿고 탄소 에너지원의 감축을 준비했는데, 탄소중립이라는 새 로드맵이 등장하자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느냐며 당황하는 모습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3차 에너지 기본계획은 오는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30~35%까지 확대하기로 정했다”면서 “그러나 탈원전을 전제로 2050년까지 발전 부문이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생에너지를 80%까지는 늘려야 한다”며 정부가 그린 청사진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내년 3월부터 순차적으로 가동하는 신규 석탄화력 발전소 7기도 골칫거리다. 정부가 약속한 탄소중립 2050을 구현하려면 이들 발전소는 일 년 가운데 절반을 멈춰있거나 완공 직후 폐쇄해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장밋빛 희망’만 쏟아져나오면서 에너지 업계에서는 지난해 기업과 학계 등 다양한 이들의 의견을 반영해 작성한 제3차 에너지 기본계획을 정부가 1년 만에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려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유화학 업계는 탄소중립에 뒤따를 구조조정의 진통을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해소할지 뚜렷하지 않다는 점에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이번 발표 내용에는 ‘사업재편에 대한 인센티브 강화’가 적시돼 있기는 하지만 정유화학 업계도 그 대상에 포함될지, 또 어떤 방식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인지 드러나지 않아 업계서는 추측만 무성하다. 정부의 전략안에는 내연기관 완성차·부품업체만 언급됐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국내 정유 3사가 적자 5조원에 허덕여도 정부는 각종 지원을 약속해준 항공·여행업계와 달리 각자도생하라는 메시지를 내놓은 상태”라며 “현재의 탄소 기반 사업을 줄여 미래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탈황설비 또는 수소와 관련한 제반 기술에 대한 투자를 시도하는 기업에 확실한 인센티브를 약속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한동희·이수민기자 dwise@sedaily.com

한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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