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 금지는 원래 승려의 계율이었으나 중고(中古) 시대 이래 궁중에서도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부터 쇠고기와 양고기는 늘 올리고 돼지·사슴·멧돼지·토끼 고기는 때때로 소량을 올리려 한다.’ 일본 궁내청이 펴낸 ‘메이지 천황기’ 1871년 12월 17일 기록 중 일부다. ‘중고 시대’란 정확하게 675년.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40대 일본 왕 덴무(天武)가 살생금지령을 내린 후 일본은 육식을 멀리해왔다.
육식 금지는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았다. 75대 스토쿠에 이르기까지 살생금지령을 내리거나 방생했다는 기록이 11차례나 남아 있다. 왕이 실권을 잃고 대제사장과 비슷한 지위로 격하된 뒤에도 금기는 이어졌다. 사실상의 국왕으로 군림하던 쇼군(將軍)들도 살생금지령을 내렸다. 5대 쇼군 쓰나요시는 잡아먹는 것은 물론 늙었다고 버리는 행위에도 유배령을 내렸다. 상전으로 변한 개를 방기하는 통에 유기견이 늘어나자 전국에 개 수용소까지 지어 돌보느라 재정에 문제가 생긴 적도 있다.
무려 1,200년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진 육식 금지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은 부국강병과 서구화의 열망.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꿈꾸던 일본은 지식과 문물을 따라잡으려 애를 쓰면서도 넘지 못할 벽에 머리를 싸맸다. 서구인의 월등한 체격을 부러워하던 일본의 선택이 바로 육식의 부활. 20세 메이지 왕은 공개적으로 서양식 식사를 하고 우유를 마셨다.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문명인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생겼다.
사회적 반발도 없지 않았다. ‘육식을 하게 돼 땅이 더러워지고 신이 사라졌다’며 궁중에 자객단이 난입하고 일부 신문은 ‘주상의 수라상에서 양식을 없애고 민간에 퍼진 서양의사를 몰아내자’는 캠페인을 펼쳤다. 몰락한 승려나 막부 출신 떠돌이 무사들의 반대에도 육식은 급속도로 퍼졌다. 쇠고기 나베와 단팥빵을 거쳐 돈가스와 카레라이스 등 일본화한 서양 음식이 대중 속에 자리 잡았다.
일본의 음식 금기는 한반도와 관련이 깊다. ‘중고 시대 살생금지령’의 숨은 이유가 갑자기 세력이 커진 백제·고구려계 망명 집단에 대한 견제라는 해석도 있다. 육식 금지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조선 통신사에 대한 접대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내장과 다리 등은 먹지 않던 음식 문화도 근대화 이후 재일 조선인들의 영향을 받아 변했다. 그렇게 ‘육식을 통한 신체 개량’을 추진했건만 일본인의 신체 조건은 한국에 뒤진다. 20대 한국 남성은 또래 일본인보다 평균 3㎝가량 크다. 한국은 세계 45위, 일본은 83위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