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대형 전자 회사에 근무하는 40대 직장인 오대희(가명)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한층 확대된 ‘유연한 근무’를 즐기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유연근무제 시행으로 하루 최소 4시간만 일하면서 주당 총 40시간을 일하면 됐지만 이제는 최소 출근 시간이 폐지되고 재택과 직장에서의 근무시간을 합쳐 한 달 근무시간만 채우면 된다. 극단적인 경우 하루에 1~2시간만 컴퓨터에 접속해 일해도 된다. 초등학교와 중학생 자녀가 있는 오 씨는 덕분에 자신의 스케줄을 조정해 그동안 소홀했던 아이들의 교육도 더 챙길 수 있게 됐다. 또 방치해놓았던 주식 계좌도 다시 활성화해 적극적인 매매에 나서고 있다. 특히 출근 준비 시간이 사실상 필요 없어지면서 오후 11시 30분에 시작하는 미국 주식 시장을 보는 데도 부담이 없어졌다.
# 금융사 홍보 담당자인 A씨는 코로나19로 얼떨결에 ‘저녁이 있는 삶’을 얻었다. 약속이 대부분 취소되거나 피치 못해 진행하는 저녁 자리도 서둘러 끝나기 때문이다. 오후 9시 폐점을 앞두고 8시 30분 즈음이면 서둘러 술잔을 들이키고 일어설 준비를 한다. 주말을 채웠던 이런저런 지인이나 가족 모임도 사라져 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크게 늘었다. A씨는 어쩌다가 닥친 ‘워라밸’이 반갑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할지 고민도 커졌다.
'국민 시간표’ 가고 ‘맞춤형 시간표’로 산다 |
코로나19가 일상의 시간표를 바꾸고 있다. 매일 코로나19 감염자가 1,000명을 넘어서고 방역 3단계 격상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정상으로 돌아가는가 싶었던 일상은 다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자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더 늘어난 재택근무, 온라인 강의, 오프라인 활동 중단이라는 환경에서 혼자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는 ‘혼족’은 자신만의 알람에 맞춰 삶을 살아간다. 해외 파견 직장인이나 유학생들은 코로나 난민이 돼서 돌아와 현지 시간을 따라 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다 갖는 저녁 약속 자리도 과거에는 대중교통이 끊기는 시간이 마지노선이었지만 요즘에는 오후 8시 30분부터 서둘러 마무리할 준비를 해야 한다.
코로나 이전 사람들은 직장·학교·강습 등 오프라인의 일괄적인 시간에 따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시차 근무제, 재택근무, 온클(온라인 클래스)이 대세가 되면서 통근·통학 시간이 대폭 줄어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지난달 취업 포털 사이트 인쿠르트가 직장인 748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재택근무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53.9%로 절반을 넘었고 이들의 재택근무일은 평균 49.1일로 집계됐다. 올해 중 두 달은 꼬박 사무실이 아닌 집에서 일한 셈이다.
응답자 대부분은 재택근무로 달라진 삶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설문 응답자 중 77.5%는 ‘만족’에 표를 던졌는데 그 이유는 출퇴근 시간 절감(29.5%), 불필요한 회식·행사 없음(15.0%) 등으로 근무 이외의 빼앗기는 개인 시간이 없다는 점이 주를 이뤘다. 재택근무에 불만족 의사를 내비친 근로자는 22.5%에 그쳤다.
일상생활 반경이 크게 달라지면서 저마다의 필요나 관심사를 좇아 하루 일과 시간표를 다시 짜고 있다. 타인과 접촉을 피하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시간 조정이 훨씬 용이해졌다. 코로나19로 일정 조정이 손쉬워졌다는 이점을 살려 또 다른 나를 일컫는 일명 ‘부캐(副캐릭터)’를 만들거나 여러 직업을 가진 ‘N잡러’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정성태(가명·28세) 씨는 여느 때처럼 오전 7시에 눈을 떠 집을 나서지만 그는 캠퍼스가 아닌 강남의 한 금융회사로 발길을 향한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지만 그는 취업용 스펙을 쌓기 위해 지난 9~10월 용산의 한 금융사에서 인턴을 한 데 이어 이달부터는 또 다른 곳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학업’과 ‘인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전면 시행된 비대면 강의 덕택이다. 이번 학기 그는 평일에는 인턴의 신분으로 살다가 주말이면 한 주간 밀린 수업을 몰아 들으며 본래 신분인 학생으로 돌아간다. 정 씨는 “대면 수업의 경우 6번 불출석하면 F 학점을 받게 돼 있어 학기 중 인턴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며 “코로나19로 취업 시장은 얼어붙었지만 방학에만 할 수 있는 인턴을 학기 중에 병행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설명했다.
늘어난 개인의 시간…취미, 자기 계발에 몰두 |
연말에도 송년회 등 외부 활동이 ‘올스톱’되면서 절약된 시간과 돈을 온라인을 통한 취미 생활이나 자기 계발을 위한 용도로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온라인 강의 플랫폼인 클래스101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인 올해 1월 말 대비 이달 16일까지 가입자 수가 2.5배 늘었으며 신규 가입자 수도 전년 동기 대비 2배 증가했다. 권정화 클래스101 PR팀장은 “취미와 재테크, 자기 계발 온라인 강의를 듣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며 “수요가 늘면서 개설된 강좌도 1월 말 450개에서 12월 현재 약 1,300개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재택근무 덕에 서울 강북구 우이동 집에서 강서구 등촌동 직장까지 하루 약 4시간이었던 통근 시간을 줄인 2년 차 직장인 김연우(가명·28세) 씨도 최근 여유 시간 활용법을 찾았다. 그는 “집에서 배울 거리를 찾다가 인터넷으로 ‘타로’ 강좌를 수강하고 있다”며 “주변을 둘러봐도 온라인으로 재테크 강의 등을 듣는 사람의 숫자가 많이 늘었다”고 전했다.
온라인서점 YES24에 따르면 올해 1~11월 전체 도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23% 증가했으며 특히 주식투자 광풍에 힘입어 경제·경영도서가 같은 기간 43.0%, 자기 계발 서적은 32.0% 급증했다. YES24 측은 “올해 종합 베스트셀러의 판매 동향을 살피면 투자·재테크 관련 도서와 공부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학습서, 자기 계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늘어난 자율성'…“개인 역량에 대한 평가 엄정해질 수도” |
‘집단의 시간’이 가고 ‘개인의 시간’이 왔지만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도 나온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임 모 씨는 평소 정해진 시간에 회사에 출근해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직장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왔다. 지금껏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상사는 ‘임씨가 일하고 있구나’라고 인식했다.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재택근무가 시작되고는 매일 아침 오늘의 근무 계획을 제출하고 퇴근 시점에는 달성 현황을 또 제출해야 한다. 임 씨는 “재택근무를 하니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불안하다”며 “게다가 서면으로 매일 업무 일지가 남다 보니 그전에는 파악하지 못했던 업무량이 기록돼 더 긴장하게 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코로나19가 일, 공부, 여가 활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스케줄이나 목표 관리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택근무는 회사가 개인의 업무량과 역량을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성민 한국생산성본부 박사는 “지금은 코로나19 대응 때문에 회사에서 미루고 있지만 상황이 개선되면 앞으로 회사는 개인들의 성과 평가를 더 엄격하게 할 수 있다”며 “개인의 생산성을 높이고 역량을 키우는 일이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