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루가 23:34).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벌주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한 목동은 아이를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갔고, 그 왕이 아이를 키웠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 산속 오솔길에서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이던 낯 모르는 왕을 만난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했고,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였다. 그 후 그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그가 죽인 왕이 자기 아버지고, 동침했던 여왕이 자기 어머니였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동안 운명의 신은 그의 백성을 괴롭히며 질병으로 짓눌렀다. 백성의 고통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바늘로 자기 눈을 찔러 영원히 장님이 돼 테베를 떠난다.
책은 언제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확 달라진다. 체코 출신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젊었던 나에게는 '공감 1도 없는' 연애소설이었다. 이재룡 역, 민음사 제4판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혔다. 소련의 체코 침공 후 국가의 폭력에 희생되는 시민의 삶을 보았다.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며 이 길을 용감하게 지켜왔다. 훗날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광신자들은 살인자였다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러자 비난이 들끓었다. 이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었으며 합법적인 살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당신들이오! 그러자 이런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대답했다.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따지고 보면 우리도 결백한 거야!
“따라서 논의의 초점은 이 문제로 귀결된다. 그들이 몰랐다는 것이 사실인가? 혹은 그저 모르는 척한 것일까?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것이 쿤데라의 질문이다.
가해자는 스스로 눈을 찔러 속죄해야 하나? 아니면 바보였으므로 용서 받아야 하나? 그런데 예수님도 기가 막힐 것은 가해자들의 반박이다. 자기들은 절대 바보가 아니며, 옳은 일만 했고,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혹시 잘못됐다 해도 그건 남 탓이란다. 예수는 2,000년 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할 때 이미 이런 무지한 자들까지도 용서했다. 물론 쿤데라가 예수의 답을 몰랐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