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고전 통해 세상읽기] 過勿憚改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약자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폭력

철부지들 추억으로 볼 일 아냐

반복되지 않게 철저히 성찰하고

사람 대하는 시선과 자세 바꿔야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학교 폭력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학교 폭력은 학교 안과 밖에서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거나 다수가 특정인에게 지속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줄곧 문제가 돼왔다. 근래에 스포츠계에서 학창 시절 일어난 폭력에 대해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피해자가 가해자의 언행을 문제시하면서 학교 폭력이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는 지난날의 언행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는 사례를 고위 공직자 청문회 과정에서 몇 차례 경험한 적이 있다. 부동산 거래 가격을 축소하거나 자녀의 입학을 위해 주민등록법을 위반하는 사례 등이 자주 도마 위에 올랐다. 그때마다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며 관행이라는 이유로 과거의 행위를 변명했다. 때에 따라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해 낙마하거나 사과한 후에야 고위 공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최근에 불거진 학교 폭력 문제도 과거에 함께 선수 생활을 하던 사이에 일어난 일이 재연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가해자는 과거의 일로 인해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어떠한 제재를 받지 않고 영광을 누리고 있다. 반면 피해자는 당시의 일로 인해 운동을 그만두기도 하고 지금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다. 그 일은 가해자에게 수많은 일 중 하나일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는 영혼과 관련된다.




이렇게 보면 학교 폭력은 철부지 시절 친구들 사이 또는 선후배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추억’으로 가볍게 볼 수가 없다. 가해자는 과거에 있었던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서 완전히 종료된 일로 여기고 지금의 새로운 일에 충실히 살아갈 수 있지만 피해자는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으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고통을 느끼는 현재 진행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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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인권 의식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다. 사람은 원시 상태를 벗어나 문명을 누리는 현대인이 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힘·나이·지위·경제력 등을 권력으로 삼아 약자에게 부당한 언행을 행사하는 폭군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폭군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공인된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폭군 현상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 대해,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 대해, 사회에서 다수가 소수에, 국가에서 내국인이 외국인에게,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해서도 나타나고 학교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스포츠에서 잘하는 선수가 다른 선수에 대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즉 자신이 가진 힘에 도취해 폭력을 권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스포츠 등 경쟁이 치열한 영역에서 우승하면 모든 것이 용인되고, 결과가 좋으면 폭력이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고 심지어 개인의 실력이나 국가의 국력으로 미화된다. 최근 스포츠계의 학교 폭력 문제를 보면 누군가 지금 정점을 달린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은 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출 수가 있다. 특히 스포츠는 응원하는 팬들의 사랑이 없다면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학교 폭력을 풀어가는 출발점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자는 사람이 과실을 하지 않도록 늘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지만 과실을 했다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며 ‘과물탄개(過勿憚改)’를 요구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고 의미를 축소하거나 사과를 표명하는 일로 끝날 수 없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다시금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성찰해 사람을 대하는 시선과 자세를 바꿔야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몇몇 사람의 문제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폭력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과 원인을 파악해 재발을 막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지만 일어났던 과거사에 대해 용서와 화해로 나갈 수 있는 전제다. 그렇지 않으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라며 과실을 철저하게 고치기를 꺼리고 섣불리 과거사를 매듭지으려는 ‘과탄개(過憚改)’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송영규 기자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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