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세태 꼬집은 B급 영상, 세계를 홀린 작품이 되다

■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최연소 수상자 류성실 작가

'BJ 체리장'으로 1인 미디어쇼

실제-허구 오가며 현실 풍자

밀레니얼 세대 대변하면서

정치·사회문제 유머로 비꼬아

모바일게임 형식 작품도 선봬

류성실의 2018년작 'BJ 체리장'. 6분짜리 싱글채널 영상 중 한 장면.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류성실의 2018년작 'BJ 체리장'. 6분짜리 싱글채널 영상 중 한 장면.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




‘비상 경보 방송체계. 시상 사태 알림.’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속보 같은 알림 방송이 뜬다. ‘지금은 훈련 상황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현 시간 부로 북한에서 핵 미사일이 발사되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 재난이 예상되오니…’

분칠을 넘어 밀가루를 바른 듯 새하얀 얼굴의 인물이 등장한다. 핫핑크 의상에 파란 눈화장과 진홍색 입술, 커다란 초록색 귀걸이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 유튜버 체리장(Ms. Cherry Jamg)이다. 이름 아래로 ‘한민족 평화통일 홍보대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이마 위에서 요란한 초침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타이머는 5분 여 뒤에 일어날 재난 상황에 대한 긴박감을 보여준다. 노래방 마이크를 쥔 체리장이 변조된 목소리로 “자, 오빠들, 제가 그동안 경고했던 것들이에요”라며 그간 자신이 연구하고 예측한 위기 상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사이, 분 단위로 ‘비상상황 경고’ 문구가 번쩍인다. 공포감을 극단으로 끌어올린 체리장이 말한다. “이제부터는 서울 시민이 아닌 하늘나라 시민의 마음으로 사셔야 해요. 아래 계좌로 돈을 저축한 사람은 천국에서 그 돈을 쓰실 수 있어요.”

화면에는 농협 계좌번호가 깜빡인다. 핵미사일 공격이 30초 남았다며 울먹이는 체리장이 “천국에서 다같이 왕 노릇하면서 살 수 있다”면서 눈물 훔치는 도중에 화면은 꺼진다. 마치 실제 폭탄이 떨어져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난 2018년 4월 처음 유튜브에 게시된 이 ‘BJ 체리 장’ 영상은 조회수 11만 회를 넘겼다.

류성실의 2017년작 '개선장군 시리즈'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류성실의 2017년작 '개선장군 시리즈'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


요상한(?) 영상이건만 ‘작품’이다. 작가는 류성실(28). 그는 세계적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재단이 후원하는 제19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최종 수상자로 최근 선정됐다. 지난 2000년부터 장영혜·김범·박이소·서도호·박찬경·김성환 등 ‘스타 작가’를 배출해 낸 에르메스미술상의 최연소 수상자다.



이탈리아 조각가 주세페 페노네, 프랑스 화가 장-미셸 알베롤라, 독일 슈테델슐레 교수인 양혜규 작가 등 심사위원단은 “류성실 작가는 일종의 ‘1인 미디어쇼’를 통해 예술과 비예술, 실제와 허구 등 기존의 이분법적 질서를 교란시키는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준다”면서 “그의 작품은 자신의 가족사와 동시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이슈들, 그리고 전통적 형태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합하고 재구성해 지역성과 보편성을 모두 함축하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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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최종수상자로 선정된 류성실 작가.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제19회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최종수상자로 선정된 류성실 작가.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


류 작가는 자신이 속한 밀레니얼 세대를 정확하게 대변하며 현대사회를 풍자한다. 체리장은 작가가 직접 분장해 출연한 인물이다. 마치 ‘환상적 사실주의’의 남미 문학처럼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보는 이들을 속인다. ‘체리장’ 영상에서 그는 자신을 “일등 시민의 황금카드”를 받은 사람이라 소개하고 “체리 말을 잘 믿는 상위 1%만을 위한 조언”이라며 ‘부자되는 3가지 필승법칙’을 소개하기도 한다. 총 6편의 작품을 통해 체리장은 삶과 죽음, 부활의 화려한 일대기를 보여준다.

또 다른 대표작 ‘대왕트래블’은 효도관광의 왜곡된 이면을 드러낸다. 동남아나 중국 어디쯤일 법한 가상 지역 ‘촁친’의 동굴여행으로 이끄는 관광가이드 나타샤, 아무에게나 반말을 쓰며 젊은 여자를 흘끔거리는 할아버지를 통해 작가는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의 허점을 꼬집는다. 한국의 토착성과 신자유주의의 충돌이 드러낸 사회상을 ‘패키지 투어’라는 소재에 투영한 작품에서 작가는 혼자서 모든 등장인물을 연기했다.

류성실 '대왕트래블2020'의 한 장면. 모바일을 통해 15분짜리 패키지투어에 참여하듯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류성실 '대왕트래블2020'의 한 장면. 모바일을 통해 15분짜리 패키지투어에 참여하듯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


수상자 발표 직후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만난 류 작가는 “20대 초반에 실제 BJ 활동을 했을 당시 ‘지성이 마비된 듯한 인터넷 정글’을 경험했고 언젠가 작업의 소재로 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또 “대가족 생활을 하면서 당시 어른들에게서 젊은 세대에 의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이 위협 당하는 듯한 공포감을 읽은 적이 있어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켰다”고 덧붙였다. B급 정서를 물씬 풍기는 영상 작업에 대해서는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을 거울처럼 비출 때 생겨나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면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공포정치가 인터넷 상에서 코믹한 밈(meme) 콘텐츠로 유통되는 것처럼, 정말 심각한 사안을 유머로 희석해 버리는 사례들을 풍자적으로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합정지구,탈영역우정국 등 대안공간과 미술관 전시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작가는 지난해 웹 전용 전시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최근에는 모바일게임 형식의 작품도 내놓았다.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수상 기념 전시가 내년에 열릴 예정이다.

류성실의 '죽지않는 가문' 중 한 장면. 모바일게임 형식의 2분짜리 작품이다.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류성실의 '죽지않는 가문' 중 한 장면. 모바일게임 형식의 2분짜리 작품이다. /사진제공=에르메스코리아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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