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대한민국 인구의 약 20%가 사는 곳, 일자리의 절반이 모여있는 곳, 가장 취업하고 싶은 곳, 바로 ‘서울특별시’ 입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이자 정부의 축소판인데요. 그렇다면 이 막강한 서울의 대표는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대통령 만큼이나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어 잠재적 대권주자는 모두 거쳐가려고 하는 자리, ‘서울시장’ 입니다. 1946년 서울시가 출범하면서 지금까지 서울시장직을 역임한 인물은 총 33명. 지금이야 우리 손으로 직접 서울시장을 선출하지만 30대 이전만 해도 대통령이 직접 시장을 임명하는 ‘관선’시대 였는데요. 과연 관선과 민선, 어떤 인물들이 서울의 역사를 만들어왔는지, 서울의 변화와 핵심 인물을 중심으로 한 번 살펴볼까요?
역대 서울시장이라 하면 김현옥 시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죠. 거의 서울의 뼈대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오늘날의 서울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김현옥 시장은 1966년~70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관선 14기 서울시장이 됐습니다. 불도저와 같이 서울 개발을 거침없이 진행해 별명이 ‘불도저’로 붙여졌다고 하네요. 그래서 일까요? 건설 현장에는 돌격이라고 써진 헬멧을 쓴 김현옥 시장이 종종 출몰했다고 합니다.
김현옥 시장은 불도저라는 별명 답게 4년간 정말 많은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1960년대 서울은 증가하는 인구로 인한 교통과 주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죠. 수송 장교라는 군인 출신이었던 김현옥 시장은 교통문제 해결에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먼저 당시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도로 체계를 완전히 재정비하기 시작해요. 번잡한 서울의 교통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로를 확장하고, 도로를 새로 짓기 시작했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도로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게 많습니다.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방사선 도로(홍제동 ? 갈현동), 외곽과 외곽을 연결하는 순환도로(북악스카이웨이),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독립문-사직공권) 등의 도로와 요즘은 찾아볼 순 없지만 충정로부터 아현동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 고가도로를 비롯해서 신촌-이대부터 마장동을 잇는 청계 고가도로, 한강대교북단 고가도로, 서울역 고가 도로 등 크고 작은 고가도로가 만들어졌고요. 한강대교 남단에서 여의도를 잇는 고가 고속도로인 강변1로(지금의 노들로)를 비롯한 강변대로(양화대교 북단-성동교)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남산1·2호 터널, 삼청터널, 사직터널도 김현옥 시장 시기에 만들어져 교통난을 해소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도로가 확장되어도 여전히 도로는 자동차와, 사람, 전차 등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김현옥 시장은 번잡스러운 도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로 구조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우선 교통체증의 원인으로 지목된 로터리와 전차를 철거했고요. 그 자리에 육교와 지하도를 만듭니다. 자주 들어봤던 세종로 지하도, 명동 지하도, 동대문 옆 지하도, 한국은행 앞 지하도 등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로와 지하도는 당시 서울의 교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긴 했지만 너무 빨리 진행된 공사 때문일까요. 지하도에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한 신문에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공사 때문에 교통난이 더 심하다”는 독자투고도 나왔다고 합니다.
고가도로, 터널, 육교, 지하도…이것만 해도 서울이 공사판이었을 것 같은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김현옥 시장은 서울 부지를 좀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넓은 건물이 아니라 높은 건물을 짓기 시작했죠. 그 때 만들어진 여러 고층 건물 중 하나가 바로 종로 3가의 세운상가입니다. 슬럼화된 판자촌을 재개발하고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인데요. 이 개발로 북한산-종묘-남산을 잇는 녹지축이 끊긴 점은 다소 아쉽긴 하지만 거리에 흩여졌던 상인들을 한 데 모이게 하는데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전자 산업의 메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상권을 형성했던 세운 상가는 현재 ‘다시, 세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보행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의도 역시 김현옥 시장 때 개발되었는데요. 원래 여의도는 ‘너나 가져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 서울시가 행정구역을 강남, 강서, 송파 등으로 확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의도는 서울의 중심이 되었고, 불도저로 불렸던 김현옥 전 시장은 “저 쓸모없는 섬을 개발하겠다”는 결심과 함께 ‘한강정복사업’이란 토목공사를 강행했죠. 여의도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인천부터 영등포, 여의도, 서울을 잇는 ‘서울대교’, 오늘날의 ‘마포대교’와 ‘한강대교’가 만들어졌고요. 방송국, 행정기관, 증권감독원, 증권거래소 등이 여의도로 입성하며 자연스럽게 비즈니스, 정치의 중심가로 자리잡게 됐죠.
1960년대의 서울의 모습을 보면 판자촌이 마구잡이로 들어서 있습니다. 실향민, 지방인구 등 서울로 올라오는 인구가 점점 많아지며 자연스레 판자촌도 생겨나게 됐는데요. 자연재해로 무너지고 슬럼가를 형성하게 되는 등 문제가 생기며, 김현옥 시장은 판자촌을 철거하고 시민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죠. 철거 대상은 청계천, 남산, 이촌동, 여의도 일대의 판자촌. 종로의 철거민은 상계동에, 청계천변의 철거민은 중계동으로 이동했고, 그 밖에도 많은 철거민들이 목동, 신림, 거여, 마천, 광주 대단지 등으로 이동하여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 없이 이주된 철거민들은 이주 후 다시 판자촌을 형성했고 수도와 화장실을 비롯한 도시 기반 시설 부족 등의 심각한 생존 문제를 겪었다고 합니다.
김현옥 시장은 판자촌처리계획의 일환으로 시민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시민아파트는 32개 지구에 434개동 17,402호가 지어졌고요. 대표적으로 와우, 응암, 당산, 사당, 연희 아파트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놀라운 건 지금도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데에 2년이 소요되는 데, 이를 6개월만에 끝내버렸다고 해요. 어떻게 만들었는지 안봐도 뻔하죠? 그렇게 지어진 건물 중 하나인 와우 아파트는 4개월 만에 붕괴가 되었고 당시 거주 중이던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이 일로 서울 시장직을 퇴임하게 됐습니다. 불명예로 퇴진하긴 했지만, 김현옥 시장. 66년부터 70년까지 정말 서울의 근간을 거의 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성과를 위한 보여주기식 개발을 한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서울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네요.
자 이제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다음으로 소개할 인물은 염보현 시장입니다. 염보현 시장은 경찰 출신으로 1983년부터 1987년, 관선 20기 서울 시장입니다. 1980년대 서울에는 2개의 큰 스포츠 경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는데요. 염보현 시장은 성공적인 서울 올림픽 개최를 위해 한강종합개발 계획을 처음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강 종합개발계획에는 한강 일대의 고속도로 건설 및 정비, 한강 수질 개선, 한강 레저, 스포츠 시설 개발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올림픽 경기장은 송파구인데 강동과 강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없다? 세계인이 모이는 경기인만큼 서울시는 고속도로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겠죠. 그래서 염보현 시장은 한강 일대의 고속도로 건설과 정비를 추진하게 됩니다. 이 시기 만들어진 도로는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염원하며 ‘올림픽’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요. 이때 강동구와 강서구를 잇는 ‘올림픽 대로’와 광진구와 송파구를 연결하는 ‘올림픽 대교’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또한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세계에 더 나은 서울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죠. 염보현 시장은 서울의 대외적인 모습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우선 한강의 배수로를 정비하고 한강의 수질을 개선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개선된 한강에는 여가와 레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한강 둔치가 조성되게 됩니다. 강동구 하일동, 강서구 개화동에는 한강공원이 조성되었고요. 또 종합 운동장 옆에는 송파구의 ‘올림픽 공원’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한강 공원들은 후에 지금의 한강 공원들로 발전하게 됩니다.
현대인의 필수템인 지하철 역시 염보현 시장의 재임 기간에 완공되었습니다. 신설동부터 을지로 입구를 연결하며 서울을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고요. 구파발역에서 양재역을 잇는 3호선, 상계와 사당을 잇는 4호선도 개통되었습니다. 이후 서울의 1기 지하철은 서울을 순환하고 도심과 강남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로써 자리잡게 되었죠.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서울은 대한민국 경제 개발과 함께 “한강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이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행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일이 많이 많아졌는데요. 이 부분은 행정관료 출신인 고건 시장이 다음 22기 서울시장으로 선임되며 88년부터 90년의 서울을 책임졌습니다. 고건 시장은 재임 기간 동안 행정 정책의 변화와 교통 문제 해결을 추진하며 행정 관료 출신의 장점을 부각시켰어요. 문민정부에 가장 강조하던 ‘청렴’의 가치에 따라 고건 시장도 행정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하고자 했어요. 구체적으로 시민을 위한 생활 행정, 참여 행정, 공개 행정으로 시정 방침을 변경했습니다. 또한 공사 계약과 관련해서 발생한 시민과의 오해를 풀기위해 관련 서류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열람실을 운영하기도 했죠.
제2기 지하철 개발도 추진합니다. 기존의 지하철로는 서울 인구의 16~20%가량만 이동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더 확장해 지하철 5·6·7·8호선을 추가합니다. 고건 시장 때에 이르러서 현재 우리가 아는 지하철 체계가 완성됩니다. 고건 시장은 현재 행정 관료 출신의 장점을 활용해 시정을 펼친 ‘행정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건 시장 이후에는 1년이 마다하고 스캔들과 대형사고로 서울시장직을 내려놓았던 단명 시장들이 많았습니다. 23대 박세직 전 시장은 수서택지개발 특혜의혹으로 53일만에 사퇴. 26대 김상철 시장은 우면동 자택의 그린벨트 무단훼손 논란으로 부임 7일만에 사퇴.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임명된 28대 우명규 시장은 기술부 재임당시의 책임 문제가 불거지며 11일만에 옷을 벗었습니다. 서울시장 관선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최병렬’ 전 서울시장은 우명규 시장 다음으로 서울시장에 임명받아 당시 밤을 새워가며 교량 점검과 사고 수습에 남은 임기를 모두 채웠죠.
95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서울시장 관선시대도 차츰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서울은 이제 민선, 즉 시민이 직접 뽑은 서울시장과 함께 발전해 오게 되는데요. 선거시대와 함께 ‘대선 특급열차’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대선주자들이 다녀갔던 서울시장의 자리, 과연 누가 있었는지 한 번 알아볼까요?
/정수현 기자 value@sedaily.com, 한상우 인턴기자 sw7015@sedaily.com, 이현지 인턴기자 hyunji167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