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철조망 걸린 플라밍고…이민자의 좌절된 꿈

◆화제의 '헤르난 바스' 개인전

'아메리칸 드림' 등 스토리텔링

그림 참맛에 1만4,000명 몰려

헤르난 바스의 '분홍색 플라스틱 미끼들' /사진제공=스페이스K헤르난 바스의 '분홍색 플라스틱 미끼들' /사진제공=스페이스K




영국 출신의 데이비드 호크니(84)는 날씨 영향을 받은 까닭인지 곧잘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사시사철 화창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머무르면서 긍정적 성격으로 바뀌었고, ‘수영장 시리즈’를 통해 눈부신 햇살과 그로 인한 선명한 색감을 드러냈다. 쿠바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미국 마이애미에서 나고 자란 화가 헤르난 바스(43)는 호크니를 흠모하면서 LA를 대표하는 ‘수영장’처럼 자신의 고향 플로리다의 상징을 고민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플라밍고다. 신비로운 핑크빛 깃털에 한쪽 다리를 들고 선 채로 기다란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플라밍고는 우아함 그 자체로 보인다.



헤르난 바스의 개인전이 한창인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전시장 맨 안쪽에 자리를 차지한 그의 2016년작 ‘분홍색 플라스틱 미끼들’의 주인공은 낡은 캐딜락에 기대어 반항아적 기운을 물씬 풍기는 모자 쓴 청년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림 아래쪽 상자 안을 채우고 있는 한 무더기의 플라밍고 인형들이다. 이들에 속아 유인된 진짜 플라밍고는 다리가 그만 철조망 사이에 끼고 말았다. 작가가 그리고자 한 것은 흔히 알려진 플로리다 해변의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 화려한 부촌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캐딜락은 녹슬었고, 제임스 딘을 닮은 청년은 고민에 잠겼다. 꿈 많았던 정원은 방치된 채 잡초가 무성하다. 전시를 기획한 이장욱 코오롱(002020) 스페이스K 수석 큐레이터는 “플로리다는 유명인사들의 별장과 디즈니랜드가 있는 곳인 동시에 헤르난 바스의 부모 같은 남미 출신 이민자의 땅”이라면서 “떠나왔던 그곳보다도 더 위험해진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을 철조망에 걸린 진짜 플라밍고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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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상징이 있는 그림으로 유명한 헤르난 바스의 전시가 인기다. 지난 주말 하루 평균 관람객은 600명. 25일 현재까지 누적 관객은 1만 4,000명에 이르렀다. 화려한 작가 라인업을 자랑했던 직전 전시 관객 수가 평일 평균 80명, 주말 150명에 불과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한 상황에서 관객이 4~5배 수준으로 급증했고, 방문객은 지역 주민 위주에서 전국으로 확대됐다. 김선정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 영국 작가 리암 길릭 등 미술계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방탄소년단(BTS)의 RM과 러블리즈의 지수, 디자이너 정구호 등도 전시장을 다녀갔다.

인기의 이유는 그림이 전하는 ‘이야기’와 디지털 매체에 밀려 잠시 잊고 지낸 그림의 참맛에 있다. 작가는 평소 관심을 가져온 고전문학이나 종교, 신화, 영화에서 발췌한 단편들을 엮어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구성하는데, 전통 회화에서 즐겨 쓰인 알레고리(비유적 표현)의 상징을 그림 속에 숨겨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재주가 남다르다. 또 여타 유명 화가들과 달리 조수 없이 오로지 혼자서 그림을 완성하기에 흉내낼 수 없는 응집력으로 회화 본연의 맛을 펼쳐 보인다. 또 하나의 인기 요인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대성이다. 이 수석큐레이터는 “전시 내용이 사회안전망의 끝으로 내몰리는 청춘들의 고민을 되돌아보게 한다”며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SNS를 통해 전시를 소개하고 자신의 감상을 공유해 파장을 전달하는 것이 결정적 흥행요소”라고 말했다. 전시 ‘모험, 나의 선택’은 5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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