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반딧불이’, 오가와 이토의 ‘츠바키 문구점’, 히가시노 게이고의 ‘숙명’. 국내에도 팬층이 두터운 일본 유명 작가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같은 번역가의 눈과 머리, 손을 거쳐 한국 독자들에게 닿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작품의 분위기가 살아나고 글투에서도 각 작가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번역가의 내공 덕분이다. 이런 점 때문에 ‘책 좀 읽는’ 독자들은 책을 고를 때 작가와 함께 번역가의 이름 석 자를 꼭 확인하곤 한다.
지난 30년 동안 수 백 권의 일본 소설과 에세이, 동화 등을 번역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 온 권남희가 최근 번역가의 일상을 솔직하게 고백한 에세이 ‘혼자여서 좋은 직업(마음산책 펴냄)’을 냈다. 생애 첫 에세이는 아니다. 지난해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상상출판 펴냄)’를 냈다. 재미있다는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컸다. 이에 한 번 더 용기를 내 다른 작가의 언어를 우리 말로 옮기는 번역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내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조금 더 과감하게 풀어냈다.
권남희는 10일 서울경제와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초심으로 돌아가면 큰 일 날 번역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솔직히 번역 일 초반에는 책임감이란 게 없었다”며 “내가 잘못하면 편집자가 고쳐주겠지, 하고 편집자에게 의지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 초심은 버린 지 오래다. 그는 “지금은 아무래도 30년 차이다 보니 그 세월 만큼의 책임감이 크다”며 “교정지를 받을 때마다 떨린다”고 말했다.
번역 과정에서 시대 흐름에 맞는 문체를 사용하는 것은 그에게 노력의 수준을 넘어 거의 본능에 가깝다. 권남희는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직업적 본능으로 젊은 세대의 생각이나 언어를 빠르게 습득하는 편”이라며 “책에서 우리나라 50대 가운데 신조어 많이 알기로는 상위 0.1%에 들 것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다”고 말했다.
저마다 다른 작가들의 글투를 실감 나게 살려내는 비법을 묻자 그는 “다소 매끄럽지 않더라도 원문에 충실하게 하려고 한다”며 “원문대로 번역하다 보면 작가의 나이와 성별과 글투는 절로 살아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이에 더해 “원서에 존재하는 차별 언어를 번역할 때는 쓰지 않고, 소셜미디어(SNS)의 짧은 문장에 익숙해진 젊은 독자들을 위해 간결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한다”고 자신만의 번역 노하우를 전했다.
이번 신간에는 일본 작가들을 직접 만난 에피소드도 담겨 있다. 오가와 이토는 번역가를 ‘제2의 엄마’라고 칭했는데, 권남희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자식’은 누구일까. 그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머리 속으로 책 제목이 줄줄 지나가서 어느 한 작품을 잡을 수가 없다”면서도 “ 요즘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되는 사인본에 ‘근사한 봄, 멋진 하루!’라고 사인을 해서 인지 지금은 ‘멋진 하루(다이라 아즈코 지음, 문학동네 펴냄)’가 생각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가와 이토를 만났을 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더니 뾰로퉁한 표정으로 ‘제 책 번역할 때는요?’라고 묻더라”며 웃었다.
30녅 경력의 베테랑 번역가가 꼽는 번역의 매력은 “잔물결 같은 생활이 가능한 점”이다. 평온함 그 자체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매력은 보다 현실적이다. 일한 만큼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다. 창작자의 경우 창작 활동이 반드시 수입으로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지만, 번역은 어쨌건 일을 하면 하는 만큼 수입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매력으로는 정년 퇴직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다만 “극소수를 제외하고 직장인보다 연수입이 훨씬 적다는 게 결정적 단점이어서 추천하지는 않는다”며 그는 또 웃었다.
번역가로서의 오랜 내공을 토대로 이제는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 그에게 에세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소설을 써볼 생각은 없는 지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주제넘은 일이라 민망하지만, 있다”는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소설을 내보자고 제안한 출판사가 있어서 감히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번역한 소설도 200권 가까이 되니 필사 공부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밀린 번역과 에세이 작업이 있어서 언제 쯤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활자와 멀어진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소설을 써 보겠습니다.” 언젠가 그의 소설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외국어로 번역될 날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