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관광 인프라가 잘 구비돼 있지만 워낙 서울 가까이 있는 데다 인구 120만의 수도권 대도시여서 늘상 지나치고 마는 곳이다. 하지만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만 둘러보는 데도 하루가 걸릴 만큼 수원에는 볼거리가 풍부하다. 봄의 정점을 지나 여름의 문턱으로 다가가는 계절, 녹음이 짙어가는 화성과 수원 서호(축만제)에 다녀왔다.
경기도 기념물 200호인 서호는 정조 23년(1799) 화성 서쪽에 조성됐다. 여기산(麗妓山) 밑에 있는 저수지로 수원 화성의 서쪽에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린다. 현재는 농촌진흥청 시험 답(畓)의 관개용 수원(水源)과 시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기자가 서호를 찾은 때는 평일 오후였는데도 공원 안에는 트랙을 따라 운동하는 시민들이 제법 많았다. 서호 안에는 인공 섬이 있는데 섬 안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아 가을 철새인 민물 가마우지 떼가 둥지를 틀고 있다.
서호에는 이 밖에도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큰기러기·쇠기러기·뿔논병아리·물닭·쇠백로·흰뺨검둥오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전에는 한국 고유종으로 수원 서호에서만 발견되는 잉어과 어류인 서호납줄갱이도 살았지만 현재는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호 인근 여기산도 생태의 보고다. 해발 50m의 야산인 여기산에는 중백로·쇠백로·해오라기·황로·왜가리가 대규모로 서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백로 서식지가 모두 한적한 농촌 지역인 것과 달리 도심지와 가까운 여기산에 새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은 일대의 자연환경이 잘 보전된 데다 인근 서호천에서 먹이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2급수 이상의 물에서만 먹이 활동을 하는 백로가 서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호의 자연환경이 오염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축조 당시 축만제라고 불렸던 서호는 조선 최대의 저수지였다. 수원성을 쌓을 때 연관 사업으로 내탕금(조선 시대 임금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재물) 3만 냥을 들여 축조했다고 전한다. 정조는 수원성의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를 축조했는데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만석거(萬石渠)로 1795년에 완성했으며, 남지(南池)는 만년제(萬年堤)로 1798년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조성됐다. 마지막으로 동지는 수원시 지동에 있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이 마르고 흙이 쌓여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문헌에 따르면 축만제의 제방은 길이가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기록돼 있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벼 만 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의미로, 그 표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서호 남쪽에 있는 향미정은 1831년 화성 유수 박기수가 지은 것으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落照)’는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힌다.
서호를 돌아본 후 인근 식당에서 국수와 만두로 배를 채우고 동장대로 향했다. 지금은 연무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장대는 수원 화성 동쪽 동북공심돈(속이 빈 망루)과 동암문 사이에 있는 조선시대 장대(將臺·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다.
뉘엇뉘엇 떨어지던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뒤 연무대 동편 언덕에 올라보니 조명을 받은 창룡문의 자태가 낮보다 훨씬 수려하다. 1795년(정조 19년) 건립된 창룡문은 돌로 쌓은 홍예(반원형의 구조물) 위에 단층 문루를 세우고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한쪽이 열려 있는 옹성을 쌓은 구조다. 해미읍성 등 비슷한 구조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수많은 외침을 견뎌오면서 쌓인 경험의 산물이다. 성문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에워싸 활이나 창으로 찌르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창룡문은 한국전쟁 때 문루와 홍예가 훼손됐지만 1975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됐다. 창룡문 뒤편으로 열기구가 손님을 태우고 하늘로 올라 수원 시내의 야경을 보여주는 모습이 한가로워 보였다. 감염병 공포 때문인지 나들이객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화성의 야경이 외로이 빛나고 있었다. /글·사진(수원)=우현석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