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산업의 쌀’을 넘어 ‘전략무기’로 부각되면서 산업 주도권을 잡기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중국·유럽연합(EU) 정부는 기술·제조 기반을 갖추기 위해 파격적 투자 계획과 인센티브를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최근 대기업에 대한 연구개발(R&D) 세액공제 비율을 최대 40%까지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K-반도체 전략’을 내놓으며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가장 속도를 내는 곳은 단연 미국입니다. 미 의회는 지난 1월 생산 라인 건설 시 건당 최대 3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의 국방수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같은 혜택에 인텔은 애리조나주에 2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 두 곳을 짓기로 했고 대만의 TSMC도 투자를 늘려 미국에 최대 6개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3월 반도체 제조 시설에 500억 달러를 추가 투입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주요 기업의 미국 현지 투자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국은 일찍이 ‘제조 2025’를 발표하고 반도체 내재화를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 자급률 70% 달성을 목표로 2015년부터 10년간 1조 위안(약 170조 원)의 대규모 투자를 계획한 것입니다. 중국은 특히 공정 수준에 따라 세제 혜택을 차등 지원하며 단순 제조 시설을 넘어 첨단 공정을 갖추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28㎚ 이하 반도체 공정 기반의 생산 시설에는 처음 10년, 65㎚ 이하에는 5년 동안 기업소득세를 면제하는 식입니다.
미중에 비해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EU조차 참전을 선언할 만큼 반도체 산업 육성 경쟁은 가열되는 양상입니다. EU는 오는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지금의 두 배인 20%까지 높인다는 목표 아래 설비투자액의 최대 40%를 지원할 방침입니다.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 꼽히는 대만 역시 반도체 R&D 투자비의 15% 수준의 세금을 깎아주며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일본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아소 다로 부총리가 주도하는 ‘반도체 전략 추진 의원연맹’을 발족해 정부 차원의 반도체 전략을 수립할 계획입니다.
우리 정부가 지난 13일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을 내놓은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입니다. 정부 전략의 핵심은 R&D와 시설 투자 관련 세액공제를 확대한 것입니다. 정부는 세제 항목에 ‘핵심전략기술’ 항목을 신설해 대기업에 대한 R&D 투자비의 30~40%(기존 20~30%), 설비투자 비의 6~10%(기존 3%)로 세액공제율을 대폭 늘렸습니다. 용인과 평택 등 주요 기업이 자리잡을 부지에 10년간의 용수 물량을 확보하고 향후 10년간 석박사급 전문 인력 7,000명 등 총 3만 6,000명의 관련 인재도 양성할 방침입니다. 글로벌 파워게임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업계는 일제히 환영의 뜻을 보냈습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K반도체 전략’은 국내 반도체 업계가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이번 정책은 (2년 전 정책에 더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추가적인 조치로 일종의 ‘부스터샷’인 셈”이라고 말했습니다다. SK하이닉스 역시 이날 정부 발표에 환영의 뜻을 표하며 시스템 반도체 수급 안정을 위해 전략적 투자를 늘리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 되며 글로벌 선진국들보다 한발 빠른 전략을 통해 민간의 투자를 뒷받침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윤식 유니스트 교수는 “이번 정책은 환영할 만하지만 정부는 지난 10년간 반도체 산업이 대기업 중심이라는 이유로 R&D 예산 등을 줄이는 등 정책의 지속성을 가져가지 못했다”며 “민간이나 연구기관과의 중장기 비전 공유를 통해 정책 담당자가 바뀌어도 반도체 생태계 조성 등을 위한 전략적 지원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세종=김우보 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