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월 18일. 서양의 대표 축제일 중 하나인 성 패트릭의 날, 보스턴 시민들이 흥겨움에 취해 있던 그 때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 강도가 침입했다. 경찰로 위장해 박물관 2층의 네덜란드 전시실로 향한 이들은 81분 간 머무르며 액자 속 고가 그림의 가장자리만 오려내 훔쳐 달아났다. 렘브란트 반 레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 ‘갈릴리 호수의 폭풍’(1933)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연주회’(1658~1660), 에두아르 마네의 ‘토르토니 카페에서’(1878~1880) 등 걸작만 13점, 약 2억 달러 가치의 미술품들이 사라졌다. 도난범도, 사라진 미술품의 행방도 여전히 묘연하다.
뉴욕 근교 보스턴에서 벌어진 30년 전 사건이 최근 다시 조명 받고 있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이것은 강도다: 세계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 때문이다. 보스턴 사교계를 주름잡던 자선사업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1840~1924)가 설립한 이 박물관은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풍 궁(宮)을 본 딴 건물에 서양 미술사에서도 대가 중 대가로 손꼽히는 티치아노, 라파엘, 마티스, 렘브란트 등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도난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보스턴의 시대적 상황이 있다. 보스턴은 영국으로부터 최초로 독립한 미국 도시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뒤엉켜 사는 곳이라 인종 간의 세력 싸움이 심했고, 1980년대에는 이탈리아와 아일랜드계 마피아 간의 살인·강도·마약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FBI는 마피아 소탕 정책을 펼치며 적극적으로 범죄 조직들을 제압하려 했고, 많은 조직의 우두머리와 구성원들이 수감됐다. 보스턴이 속한 매사추세츠 주의 전설적 범죄자이자 미국 최고의 미술품 도둑이었던 마일스 조지프 코너 주니어는 이러한 범죄 조직들에게 인상적인 선례를 남겼다. 무장한 채로 1975년 보스턴 미술관을 털어 렘브란트의 작품을 훔쳐낸 그는 그림을 ‘인질’로 FBI와의 협상을 통해 감옥에서 석방됐다. 그 후로 절도한 가치 있는 미술품 한 점은 감옥 탈출을 위한, FBI와 협상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전설적 소문이 퍼졌다.
이처럼 도난당한 미술품은 범죄 조직들에 의해 악용됐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술품은 합법적인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 범죄 조직들은 암시장에서 원래 가치의 3~10% 가격에 절도한 미술품을 담보로 맡기고 마약을 밀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암시장의 미술품 거래 규모는 약 7억~8억 달러로 추정된다. 미술품은 세계적인 국제통화인데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금융기관에 비해 보안이 취약했기에 마피아 같은 범죄 조직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박물관·미술관들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도 미술품 도난 사건들이 발생했다. 보안요원 수가 감소한 데다, 대다수 미술관들이 인터넷에서 가상 전시관을 제공한 것이 화근이었다. 네덜란드의 싱어 라렌 박물관과 혹쉬 판 에르덴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봄철을 맞은 누에넨 목사 관사의 정원’(1884)과 프란스 할스의 ‘맥주잔을 든 두 명의 웃는 소년’(1626)이 각각 도난 당했다. 몇 주 전 용의자는 검거됐지만 그림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아 수사 당국이 뒤쫓고 있다.
현재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의 도난 당한 작품 자리에는 그림 없는 빈 액자만 걸려 있다. 설립자 가드너는 생전에 “만약 내 컬렉션을 바꿔야 한다면 작품들을 상자에 담아 파리로 보내 경매에 부치고 그 수익금을 하버드 대학교에 기증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미술관을 연 수집가들은 철학을 갖고 모은 자신의 컬렉션이 관람객과 교감하기를 바란다. 잃어버린 작품들이 온전히 돌아와 다시 대중 앞에 설 날을 희망한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필자 엄태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에서 아트비즈니스 석사를 마친 후 경매회사 크리스티 뉴욕에서 근무했다. 현지 갤러리에서 미술 현장을 경험하며 뉴욕이 터전이 되었기에 여전히 그곳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