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이 정상회담을 통해 해외 원전 시장에 공동 진출하기로 합의한 것이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의 변화를 이끌지 주목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합의가 탈원전 정책 항로 변경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지만 변화의 단초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이번 합의가 미국이 신규 원전 시장을 싹쓸이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가운데 나온 국제 공조인 만큼 한국은 미국 주도의 원전 공급망 참여 정도로 사업이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1일(현지 시간) 발표한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원전 산업 공동 참여를 비롯해 해외 원전 시장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최고 수준의 원자력 안전·안보·비확산 기준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 핵확산 방지를 위해 양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추가 의정서’에 합의한 국가에 대해서만 원전 수출이 가능하도록 제한 조건을 두기로 했다.
이번 합의는 크게 보면 한미 간 원전 사업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원전 종주국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공·관리 능력을 가진 한국은 최적의 파트너다. 이미 미국은 웨스팅하우스사와 제너럴일렉트릭(GE)을 앞세워 미국형 원전 건설을 추진하면서 우방국과의 국제 공조 강화를 꾀하고 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중국과 러시아의 원전이 전 세계에 건설되면 우라늄 투입량 등을 확인하기 어려워지고 미국의 원자력 통제권도 약해진다”고 지적했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의 원전 협력 강화도 미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다.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는 탈원전 정책으로 고사 상태인 원전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원전 수출 활성화에 나설 수밖에 없다. 탈원전을 하더라도 원전 생태계 고사로 인한 산업 붕괴는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높은 기술력과 우수한 기자재 공급망을 갖춘 한국과 지정학적 영향력이 크고 해외에 이미 많은 원전을 수출한 경험을 지닌 미국이 함께 진출하면 수주 경쟁력도 매우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합의가 차세대 원전으로 꼽히는 ‘소형모듈원자로(SMR)’ 사업으로 이어질지도 관심이다. 현재 세계 각국이 SMR 시장 선점을 위해 기술 개발에 뛰어든 가운데 바이든 대통령도 탄소 중립을 실현하는 방안으로 초소형 원전 육성 정책을 밝힌 상태다.
정부에서는 이번 합의가 탈원전 정책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놓지만 원전 전문가들과 산업계는 결국 문재인 정부가 원전 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현재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양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차세대 원전 2기 수주”라며 “공동 수주 등을 위해 한국의 원전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탈원전 노선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전문가들은 탄소 감축과 신(新)성장 산업으로서 원전의 ‘잠재력’을 문재인 정부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앞으로 기후변화 문제에서 미국이 우리 산업계에 상당한 부담이 될 탄소 저감 목표치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며 “원전 없이 야심 찬 목표치를 내어놓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 입장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탈원전을 최종 실행할 경우 늘어나는 전력 수요와 탄소 감축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기 어렵다는 사실을 정부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세종=서일범 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