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에 국내 증시를 혼란에 빠뜨렸던 ‘우선주 광풍’을 연상하게 하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스팩)의 이상 급등락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코스피가 5개월 가까이 횡보 흐름을 보이는 가운데 암호화폐 가격도 줄줄이 폭락하면서 높은 변동성을 좇는 성격의 자금이 스팩으로 이동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24일부터 31까지 국내 증시의 주가 상승률 상위권은 스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승률이 가팔랐던 순서로 줄을 세워보면 삼성스팩4호가 이 기간 379.81% 폭등했으며 삼성스팩2호(151.24%), 유진스팩6호(138.60%), 하이제6호스팩(137.19%), 신영스팩5호(89.89%), 신영스팩6호(79.95%) 등도 주가가 많이 올랐다.
불과 전일까지 견고한 상승률을 자랑했던 이들이었지만 이날에는 급작스레 주가가 급락했다. 이날 하이제6호스팩과 유진스팩6호가 동반 하한가로 곤두박질쳤고 신영스팩5호(-27.72%)·하나머스트7호스팩(-27.70%)·신영스팩6호(-26.94%) 등도 주가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삼성스팩4호와 삼성스팩2호는 과도한 주가 상승을 이유로 한국거래소가 투자 경고 종목으로 지정하면서 이날 하루 주권 거래가 중단됐다.
최근 주가가 널뛰기 중인 스팩이 속출하고 있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기업 인수합병(M&A)을 목적으로 상장하는 스팩은 보통 합병이 발생하는 시기에 주가가 급등하는 흐름을 보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스팩은 상장 뒤 1년 뒤부터 합병 기업을 찾아나서며 3년 내 합병 대상을 물색하지 못하면 청산 절차를 밟는다. 최근 랠리를 펼친 다수의 스팩은 합병 등 별다른 호재가 없었다. 특히 가장 높은 주가 오름폭을 기록했던 삼성스팩4호는 지난달 21일 상장한 신생 스팩이었으며 하이제6호스팩도 지난달 10일에 코스닥에 입성한 새내기 종목이다.
‘폭탄 돌리기식’ 거래가 이뤄지면서 코인의 높은 변동성을 좇는 투자자들이 스팩으로 몰려왔다는 의혹도 짙어지고 있다. 스팩이 이상 급등한 지난달 24일은 암호화폐 가격이 폭락한 때와 겹친다. 지난달 24일 전후 미국과 중국의 규제 강화 소식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오락가락한 발언에 영향을 받아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에서 비트코인 가격은 4,000만 원 선이 붕괴되기도 했다. 한때 8,000만 원까지 치솟았던 비트코인 시세가 반 토막이 난 것으로 이더리움·도지코인 등 다른 암호화폐 역시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증시가 투기판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를 일으킨 지난해 6월 ‘우선주 광풍’과 성격이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선주와 마찬가지로 스팩은 보통 시가총액이 100억 원 정도로 소규모이고 유통되는 주식 물량도 적어 시세 조종도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실제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는 지난달 24일부터 이날까지 특정 계좌에서 매매 주문이 집중돼 시세 조종이 의심되는 38개 종목에 대해 투자 주의를 요구했는데 이 중 33개가 스팩이었다. 일례로 이날 하나머스트7호스팩은 단일 계좌에서 전체 주식 수의 4.65%나 되는 순매도 물량이 나왔다. 또 코스피가 5개월째 박스피 구간에 갇히며 횡보 장세가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합병 여부에 따라 주가가 정해져 일반 기업 대비 변동성이 큰 스팩에 대한 선호도도 높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승현 유안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기업은 펀더멘털이 있어서 주가 변동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지만 스팩은 가치를 결정하는 합병 여부 그 자체의 변동성이 크다”며 “뚜렷한 이유 없이 주가가 오른 종목은 언제든 급락 위험이 있기 때문에 투자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승배 기자 ba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