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매튜의 사랑, 가장 낮은 곳에서 빛나는 불빛

작가

'빨강머리앤' 매튜의 눈에 안 띄는 사랑

보상 받으려 하지 않기에 더욱 성숙

도움 안돼도 불평없이 늘 곁에서 품어

타인 시선에도 휘둘리지 않아 완벽

정여울 작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말을 걸어오는 문학 작품 속 캐릭터가 있다. 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중요하고, 주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용하여 눈에 띄지 않는 사람. 바로 ‘빨강머리앤’의 매튜다. 고아 소녀 앤과 천하의 모범생 마릴라의 팽팽한 기 싸움, 앤을 훈육하기 위해 엄한 벌칙을 주어도 그 벌칙마저 즐거운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앤에게 마침내 항복하는 마릴라의 사랑, 매일 기상천외한 실수를 저지르면서도 절대로 똑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앤의 천연덕스러움이 이 소설의 관전 포인트다. 두 사람의 짜릿한 감정 줄다리기에 비하면 매튜의 사랑은 밋밋하고 단조로워 보인다. 매튜는 처음부터 이 주근깨 빨강머리 고아 소녀에게 홀딱 반한 것이다. 마릴라와 앤의 관계가 매일 일촉즉발의 긴장감과 변덕스러움으로 가득하다면, 매튜와 앤의 관계는 처음부터 ‘항상 맑음’이었다.





‘남자 아이에게 농장 일을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 때문에 앤을 거부하려던 마릴라와 달리, 매튜는 차마 가엾은 앤을 기차역에서 돌려보낼 수가 없어 일단 무턱대고 집으로 데려온다.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앙상한 몸집을 한 빨강머리 앤. 처음엔 연민이 매튜를 붙들었지만, 이미 마차에 앤을 태워 집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매튜는 이 사랑스러운 고아 소녀의 따스함에 홀딱 반한다. 어린 시절 ‘빨강머리앤’을 읽을 때는 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따돌림을 당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매튜의 ‘화려하지 않은 사랑, 눈에 띄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이 작품의 숨은 백미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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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여자 아이들에게는 말도 걸기 싫어했던 내성적인 매튜가 앤을 위해 일생일대의 깜짝 변신을 시도하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여자 옷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매튜가 앤의 옷을 만들 옷감을 사기 위해 상점에 가는 장면이다. 그 이유는 매튜가 앤의 모습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스런 앤이 왜 저렇게 초라해 보일까. 다른 아이들은 소매가 한껏 부풀려진 퍼프(puff) 모양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앤만 지극히 단순하고 밋밋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철저한 실용주의자 마릴라는 앤에게 ‘퍼프 소매는 옷감 낭비’라고 주입하며 새 옷을 사주지 않았던 것이다. 매튜는 앤에게 퍼프 소매가 달린 옷을 입히며 미친 듯한 뿌듯함에 사로잡힌다. 앤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책임은 어른인 매튜가 짊어지지만, 실제로 자신이 받은 물질적 혜택보다 더 커다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은 앤이었던 것이다. 앤의 기쁨을 바라보기만 해도, 매튜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것이다.

마릴라가 ‘여자아이는 싫다’며 고집스럽게 앤을 거부하고 ‘도대체 이 아이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계산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매튜에게서 놀라운 대답이 돌아온다. 그 애가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 애에게 도움을 줄 순 있다고. 우린 그 애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 애에겐 우리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매튜의 조용한 고백을 들으며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존재조차도 그 어떤 불평과 고민 없이 완전히 내 곁에서 품어주는 것. 상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전혀 없더라도, 내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내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리라 결심하는 것. 매튜의 사랑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보상 받으려 하지 않기에 더욱 성숙하며, 그 어떤 타인의 시선에도 휘둘리지 않기에 비로소 완벽해진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당신에게, 더 깊은 배려와 자비를 누릴 자격이 있는 당신에게, 더 많은 사랑을 이 세상에 베풀 힘이 있는 당신에게, 매튜의 조건 없는 사랑, 화려하지 않으나 더욱 낮은 곳에서 빛나는 사랑을 선물하고 싶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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