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과학에 관심이 많은 서울 세화고등학교 학생 40여명이 온라인 강의실에 모였다. 과학과 철학을 엮어 해석하는 특별한 강좌가 열렸기 때문이다. 개포도서관이 지역 청소년의 인문학 소양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강의는 조현수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 교수가 맡았다.
조 교수는 “과학과 철학은 ‘진리 추구’라는 같은 목표를 갖고 있지만 각자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서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과 철학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책으로 자크 모노(1910~1976년)의 ‘우연과 필연(1970년)’을 꼽았다. ‘우연과 필연’은 현대 과학의 정설인 ‘신다윈주의’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기술한 책이다. 조 교수는 “이 책은 출간 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과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반드시 읽어 봐야할 고전으로 꼽힌다”며 “‘신다윈주의’가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다윈주의가 우주를 이해하는 배경에는 과학과 철학 사상이 엮여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물체의 운동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물체의 모든 운동은 목적을 갖고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사상은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됐다. 돌을 던지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려는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목적론적 사고는 사람이 사람을 낳아 종족을 이어가는 복잡한 과정이 안정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것도 목적지향성에서 답을 찾았다. 목적론적 사상은 17세기 뉴턴의 운동 역학이 증명되기까지 2,000년간을 지배했다. 이 후 물리학자들은 뉴턴의 이론을 중심으로 반(反)목적론적 설명방식으로 대다수의 자연현상들을 해석했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낳아 종족을 번식하는 유전과 진화에 대해서는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신다윈주의는 근대 역학의 논리가 물리학을 넘어 생물학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신다윈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생명체는 원래 같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는데 외부의 교란에 의해 내적 본성이 실패한 것이 진화라는 것이다.
조 교수는 “자크 모노는 이 책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근대 역학의 원리로 설명된다는 유물론적 우주를 주장하고 있으며 생명체는 우연한 변이가 거듭 축적돼 만들어진 존재라고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책에서 모노는 목적론적 사고 같이 과학이론에 기반 하지 않은 사상은 지식이 아니라는 함축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며 “여러분도 우주와 인간에 관한 모노의 해석에 동의하는가”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조 교수의 물음에 학생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 교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우주의 모습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며 “진리탐구의 다양한 방법에 마음의 문을 열고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우리가 우주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개포도서관이 마련한 조 교수의 ‘차가운 과학, 따뜻한 철학’ 강좌는 ‘고인돌2.0(고전·인문아카데미2.0: 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최됐다. ‘고인돌2.0’은 서울경제신문 부설 백상경제연구원과 서울시교육청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이 2013년부터 함께한 인문학 교육 사업이다. 성인 중심의 인문학 강좌로 시작한 ‘고인돌’은 지난해부터 명칭을 ‘고인돌2.0’으로 바꾸고 서울 전역의 중·고등학교와 연계해 강연을 하고 있다. 역사와 건축, 경제, 과학,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총 56개 강좌로 구성된 올해 제9기 ‘고인돌2.0’은 특히 교과목과의 연계성을 높여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세화고 2학년 장지훈 군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이 심오하고 논리적이어서 놀랐다”며 “과학을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알게 된 유익한 강의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2학년 김재원 군은 “그 동안 과학을 공부할 때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나 목적을 파악하는데 급급했다”며 “강의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3학년 김동욱 군은 “같은 현상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과학과 인문학이 단절된 게 아닌 연결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3학년 오민석 군은 “세상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고인돌 2.0은 올 11월까지 80여개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들의 인문학의 사고를 높이기 위한 강연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 이효정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원 hj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