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30년 뒤 다시 포연에 휩싸였다. 영국과의 전쟁인데 결과는 미국의 완패. 고통은 쓰라렸다. 미국의 수출은 반 토막이 났고 수입도 10분의 1로 급감한다. 정부의 재정 수입 역시 뚝 떨어졌다. 영국에 의존한 미국의 경제 체력은 그만큼 약했다. 패전이 아픔만 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각성했다. 유럽 열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조업을 키우고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그래서 꺼내 든 게 1791년 알렉산더 해밀턴이 작성한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Manufactures)’다. 해밀턴의 ‘1차 부활’이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인 해밀턴은 제조업에 주목했다. 신생 독립국인 미국의 안보와 미래를 위해 강력한 제조업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15개 제조업의 현실을 분석하고, 11개 전략적 처방을 내놨다. 완제품은 수입 관세를 물리되 원료는 관세를 면제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키워야 한다는 게 골자다. 심지어 특정 제조업에 산업 장려금을 지급해 ‘기술 인재’의 미국 유치 전략도 제시했다. 230년 전 만들어진 보고서인데도 현재의 것과 비교해 구성이나 내용이 전혀 뒤지지 않는다. 미국 산업 정책의 헌법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보고서는 그의 생전(1804년 사망)에는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면화와 담배를 유럽에 수출해온 남부의 반대가 극심했다. 패전 뒤 미국은 바뀌었다. 철강, 전기·전자, 화학, 기계 등의 분야에서 빠르고 광범위한 기술 혁신을 이뤄냈다. 2차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개인 발명가에 의존했던 영국과 달리 미국은 대기업이 혁신을 이끌었다. 정부와 기업이 똘똘 뭉쳤다. 미 제조업의 황금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패권국 영국을 곳곳에서 추월하기 시작한다. 1870~1910년 제조업의 미국 생산 비중은 23.3%→35.3%로 늘어난 반면 영국은 31.8%→14.7%로 줄었다. 성장세가 멈추지 않으면서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세계 공산품 생산의 42%, 발전량 43%, 강철 생산 57%, 원유 생산 62%, 자동차 생산 80%를 미국이 차지한다.(패권의 대이동·김대륜 著)
‘강한 제조업’의 국가 전략을 제시한 해밀턴 보고서가 나온 지 150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랬던 미국도 1970년대 이후 제조업의 지위가 흔들렸다. 일본이 무섭게 부상했다. 미국은 컬러TV·자동차에 이어 반도체까지 주도권을 일본에 뺏기기 시작한다. ‘제 2의 진주만 공격’으로 불렸던 일본의 공습에 미국은 전방위 강수를 뒀다. 장장 20년의 긴 싸움이었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를 정점으로 해 미국은 반도체 등의 주도권도 되찾아왔다. 반도체·디스플레이의 공급망도 한국 등으로 넓혔다. 특정 국가로의 쏠림 차단이다. 미국의 냉혹한 반격에 일본의 제조업은 차례로 경쟁력을 잃어갔다.
2000년대부터는 중국이 치고 올라왔다. 제조업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중국은 ‘제조 2025계획’을 내놨다. 위협적이었다. 미국이 놔둘까. 2010년 제조업 역량 강화법을 시작으로 올해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이름의 ‘공급망 재편 보고서’도 냈다. 제조업 패권을 잃지 않기 위해 230년 전의 해밀턴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폐허의 한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이끈 것은 제조업이다. 대기업 쏠림 등의 부작용도 있었지만 1800년대 초 미국처럼 정부와 기업이 똘똘 뭉친 결과다. 기업의 탓도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반(反)기업 정서는 주류가 됐다. 글로벌 경쟁을 외치면서 올해 상반기에만 1,300여 개가 넘는 규제 법안이 쏟아졌다. 극한의 ‘안보 경쟁’이 세계 무대에서 펼쳐지는데 되레 장수의 손발을 묶고 전쟁에 나가라는 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글로벌 전략을 짠 미국의 행보는 거침없다. 강한 제조업을 위해 동맹국 기업도 적극 이용한다. 삼성·현대자동차·SK·LG 등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감사의 인사를 직접 전할 정도다.
강한 기업이 곧 안보라는 ‘패권국’ 미국의 행보는 유연할 뿐만 아니라 치밀하다. 패권을 쥐어본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의 차이일까. 우린 아직도 한반도지도 위에서만 장기를 둔다. 그 지도가 세계 지도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