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어떤 나라가 미국을 신뢰할 수 있겠나.”
15일(현지 시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로부터 끝내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이날 미 블룸버그통신 설립자인 마이클 블룸버그는 편집국(editorial board) 명의의 사설에서 “앞으로 우방국들은 아프간을 손쉽게 포기해버린 조 바이든 미국 정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라고 꼬집었다.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은 성급한 미군 철수가 직접적 원인’이라는 비판이 서방과 동맹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강조해온 ‘동맹 중시’ ‘민주주의 가치 공유’가 이번 아프간 ‘포기’로 치명타를 맞았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도 이날 “바이든 정부가 외교정책에 대한 세계의 불신을 자초했다”고 논평했다.
美, 아프간에 무지했다
지난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국의 아프간 ‘보복 공습’에 함께했던 ‘최대 동맹국’ 영국이 비판 대열의 선봉에 섰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국제정치 논설위원인 기디언 래크먼은 “중국과 러시아는 그동안 ‘미국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슈퍼파워’ ‘미국에 더 이상 안보를 기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는데 미국은 이번 아프간 철군으로 이를 완벽히 입증해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탈레반과도 전투를 피하는 미국이 중국·러시아와 어떻게 대적한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미국이 동맹을 결집하며 거대한 ‘반(反)중국 전선’을 형성하고 있지만 막상 결정적 시점에 아프간에서처럼 발을 뺄 수 있다는 점을 질타한 것이다.
특히 탈레반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바이든 정부의 명백한 오판이라는 지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4월 아프간 완전 철군을 선언하며 “(탈레반은) 1970년대 베트콩처럼 아프간을 점령할 역량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불과 2주 남짓한 사이 아프간 전 지역을 전광석화처럼 차지해버렸다.
“국익핑계 아프간 버려” 비판 거세
토비아스 엘우드 영국 하원 국방위원장은 이날 “기껏해야 로켓포와 AK소총·지뢰로 무장한 무장 단체에 패주해놓고 ‘미국이 돌아왔다’고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미국을 몰아붙였다. FT도 사설을 통해 “미국은 20년 동안 주둔한 지역의 상황에 놀라울 정도로 무지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FT는 “백악관이 탈레반의 ‘예봉’에 대한 정보 당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철군을 결정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미 정가도 “바이든이 아프간 전복을 주도한 셈”이라며 바이든 행정부를 공격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실패를 책임지고 바이든 대통령이 사퇴해야 한다”고 공세를 폈다. 미 공화당 1인자인 미치 매코널 상원 의원은 “아프간의 상황은 베트남 패전 때보다 더 나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바이든 행정부는 즉각 진화에 나섰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이날 방송 인터뷰에서 “아프간은 (1975년 베트남전 때 미국이 패한) 사이공이 아니다”라며 아프간에서의 패퇴가 베트남전 패배와 비견되는 ‘굴욕’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았다. 특히 아프간에 대한 ‘불간섭’ 입장도 그대로 유지했다. 미국도 20년 동안 1조 달러(약 1,170조 원)의 막대한 재정을 투입할 정도로 국력을 소모해가며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아프간 전쟁은 9·11테러의 주범인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목표는 이미 달성했다는 심리도 있다. 실제 미국이 아프간에 투입한 병력 5,000명은 아프간 수복이 아닌 ‘미국인 탈출 지원’을 위해서만 활동하게 된다.
가니 아프간 대통령 도피…각국 탈출 행렬
아프간 현지는 아노미 상태다. 독일·프랑스·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은 자국인들은 물론 아프간인 직원들 일부도 함께 탈출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캐나다와 핀란드는 아프간 내 대사관을 잠정 폐쇄했다. 우리나라 외교부도 아프간 대사관을 잠정 폐쇄하고 중동의 제3국으로 철수했다.
주민들도 아프간을 떠나기 위해 카불국제공항으로 몰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유혈 사태도 발생했다. 로이터통신은 목격자를 인용해 “미군이 자국 군용기에 무단으로 탑승하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공중에 발포했다”며 “이후 최소 5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다만 이들이 사망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전날 우즈베키스탄으로 도피했다.
탈레반은 사회 혼란을 의식한 듯 유화 메시지를 냈다. 탈레반은 이날 성명에서 “아프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 아프간 주재 외교관과 구호단체 직원들도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