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이 자국민 대피 작업을 벌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하미드카르자이국제공항에서 두 건의 폭탄 테러가 일어나 미군 13명을 포함해 100여명이 사망했다. 중상자가 많아 사망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아프간에 근거지를 둔 극단주의 무장 세력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은 즉각 이번 테러를 자신들이 벌였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가 큰 충격에 빠진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IS-K에 즉각 군사 보복을 선언했다. 무장 정파 탈레반이 새 정부 수립에 속도를 내며 다소 잠잠해지는 듯했던 아프간 정세가 또다시 ‘시계 제로’ 상황이 됐다.
탈출 행렬 집결 호텔·공항서 자폭
26(현지 시간)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께 카불 공항의 남동쪽 애비게이트와 이곳에서 250m가량 떨어진 배런호텔에서 차례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애비게이트는 미국과 서방국들이 대피에 나선 자국민과 아프간 협력자들을 공항에 들여보내기 위해 검사하는 곳이며 배런호텔은 아프간 탈출 희망자들이 공항으로 가기 전에 집결하는 대기소다. 텔레그래프는 자살 폭탄 테러범 2명과 알려지지 않은 숫자의 총기 소지자들이 최대한 많은 사상자를 내기 위해 북적거리는 군중 사이로 잠입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번 폭탄 테러로 미군 13명을 포함해 아프간인 72명 등이 사망했다. 아프간인 사망자 중에는 탈레반 대원 28명도 포함됐다. 사실상 미군과 아프간인·탈레반을 모두 겨냥한 테러다. 카불 공항 안쪽은 미군이 관리하지만 공항 바깥의 애비게이트 인근에는 민간인을 포함해 인파가 운집해 있고 탈레반이 검문 검색 등을 해 미군과 탈레반·아프간인들이 뒤엉켜 있다. 테러 배후를 자처한 IS-K가 이곳을 공격해 테러 효과를 극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IS-K 본부인 IS도 이날 “미군과 미국에 협력한 아프간인이 (테러의) 표적”이라고 밝혔다.
IS-K는 IS의 아프간 지부 격으로 지난 2015년 IS에 충성을 맹세한 파키스탄 탈레반과 아프간 탈레반 출신을 주축으로 결성됐다. 본부 IS가 세계 각지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잔악무도한 테러를 일으키는 것처럼 IS-K도 폭탄 테러와 표적 암살이 주요 임무다. 2019년 8월 카불의 한 결혼식장에서 자폭 테러를 저질러 63명을 사망케 한 전력이 있다. 유엔에 따르면 올해 4월까지 IS-K가 전 세계에서 자행한 테러 공격은 총 77건이었다.
바이든 “끝까지 응징할 것” 선언했지만...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각국 정상들도 이번 테러를 야만 행위라고 규정하고 한목소리로 규탄했다. 미국은 이번 테러로 2011년 4월 8명이 아프간전에서 희생된 후 최대 규모의 피해를 당한 만큼 즉각 군사 보복을 예고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카불 테러 직후 대국민 담화에서 IS-K를 지목해 “끝까지 추적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강경 대응 방침을 천명했다. 그는 담화문을 읽는 도중 잠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미군의 보복 방식으로 공습을 통한 본거지 ‘정밀 타격’이 거론된다. 현재 파키스탄과 이라크 등지에 있는 IS-K의 거점을 때리는 것이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전 정부는 IS-K 전투원들이 은신해 있던 파키스탄 낭가하르의 한 동굴에 대규모 폭격을 가한 바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아프간에 병력을 재투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군사 보복을 선언하면서도 자국민 대피라는 임무 완수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당초 탈레반과 약속한 시한인 이달 31일 내에 현재 카불에 1,000명가량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국민을 모두 미국으로 데려오는 것이 급선무다. 특히 IS-K가 추가 테러를 저지를 가능성마저 거론되는 상황이다. IS-K는 미군과 평화 협상을 벌인 탈레반을 ‘배교자(배신자)’라고 부르며 적개심을 드러내왔다. 탈레반은 이번 테러 이후에도 미군 철군 시점을 이달 31일로 다시 한번 못 박았다. 테러가 철군 시점 연장의 명분이 될 수 없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올 1월 취임 이후 최대 위기에 몰렸다. 아프간 철군 전략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비판이 나오자마자 최악의 테러 참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전임인 트럼프가 탈레반과 체결했던 평화협정 이후 첫 미군 사망자까지 나왔다. 이미 미국 공화당을 비롯해 집권당인 민주당에서도 바이든 정부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유럽 등 전통의 동맹들은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회의감마저 피력하는 상황이다. 다만 테러 발생으로 일단 적전 분열보다는 테러 수습과 남은 민간인 대피 등에 최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도 이번 테러에 우려를 표시했다. 아나톨리 안토노프 주미 러 대사는 "테러는 지구상에 설 자리가 없는 악이며 공동의 노력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면서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중국은 신화통신 영문판을 통해 “이번 테러로 미국이 치명타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유엔은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30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회의를 소집했다.
탈레반은 美에 책임 떠넘겨
미국으로서는 IS-K 공격을 위해 20년 넘게 대치해온 탈레반과 공조하기가 쉽지 않은 점도 부담이다. 실제 탈레반은 이날 성명을 내고 테러가 발생한 카불 공항은 자신들의 통제권 밖에 있다며 책임을 미국에 떠넘겼다. 정상 국가를 자처하며 카불 공항 근처의 치안을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오다가 막상 테러가 발생하자 시치미를 뗀 것이다.
새 정부 수립에 속도를 내온 탈레반도 입장이 난처한 것은 마찬가지다. 테러 집단인 IS-K와 엮이는 것은 사실상 서방의 공격 빌미를 제공했던 2001년 아프간 전쟁을 답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권 수립을 위해 서방 등 외세의 원조가 절실한 만큼 탈레반도 IS-K와 전면전을 벌여야 하지만 아프간 북부 지역을 장악한 반(反)탈레반 저항군에 이어 IS-K까지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다. 새 정부 구성에 속도를 내는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 보복이 아프간을 상대로 이뤄지게 되면 탈레반도 집권 과정에 또다시 타격이 불가피해 상황이 어디로, 어떻게 튈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당장 미 철군 만료일이 31일로 코앞이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아프간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테러와의 전쟁까지 치러야 하는 어려운 국면에 맞닥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