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혁신을 다루는 핵심 법안인 전자금융거래법은 지난 2002년 만들어졌습니다. 2007년 1월 9일 고(故)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의 효시인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세상도, 금융도 아예 바뀌었죠. 그런데 법의 골간은 사실상 그대로입니다. 혁신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빨리 법 개정이 돼야 합니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01년 11월 김진표 당시 재정경제부 차관은 ‘전자금융거래기본법’ 제정 얘기를 꺼낸다. 우후죽순 늘던 ‘i캐시’니 ‘e코인’이니 하던 선불형 소액 전자 결제 수단이 등장하면서 뒤바뀌는 현실을 따라잡고 이용자를 보호할 법 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던 시기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은 2002년 6월 국회에 제출됐지만 2006년이 돼서야 국회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2일 스마트폰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바로 직전에 시행됐다.
이후 14년이 흘렀다.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 출범 3년 차인 인터넷전문은행 카카오뱅크가 시가총액 39조 원으로 시중은행 1위인 KB국민은행(22조 원)을 멀찍이 앞질렀다. 은행 창구를 가지 않고도 스마트폰을 통해 예금부터 대출까지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를 육성하고 또 이용자를 보호할 규율 체계를 담은 전금법은 PC로 인터넷뱅킹을 하던 시절인 ‘2002년식(式)’이다. 이를 바꾸겠다는 전금법 개정안이 올 3월 발의됐지만 5개월째 논의 한 번 이뤄지지 않았다.
핀테크 폭발적 성장…2013년 94개→2020년 484개로
국회가 놀고 있던 사이 핀테크 기업은 가히 폭발적으로 늘었다. 30일 금융 당국에 따르면 2013년 94개였던 핀테크 기업 수는 2020년 기준 484개로 5배 넘게 늘었다. 지난해 늘어난 개수만 139개로 증가율은 40.3%에 달한다.
문제는 현실에 맞는 법 체계의 부재로 이들 핀테크 기업의 서비스가 번번이 법에 막히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정부가 ‘우회로’를 만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금융 규제 샌드박스 도입을 위한 금융혁신지원특별법을 제정했다. 심사를 통해 혁신 금융 서비스로 지정될 경우 한시적으로 규제 특례를 적용해주는 게 골자다. 8월 말 현재 153개의 혁신 금융 서비스가 지정돼 있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혁신 금융 서비스는 굉장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사업을 허용해주고 이게 성공할 경우 범위를 확장해주는 방식이라 혁신을 육성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이 전금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내놓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스마트폰을 매개로 해 전자상거래와 금융 산업 간 장벽이 급격히 허물어지고 있다. 카카오나 네이버 등 전자상거래 기반의 ‘빅테크’는 이미 금융 산업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용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규율 체계를 뜯어고칠 필요가 커지고 있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머지포인트’ 사태다. 현행 법은 머지포인트가 설사 등록 업체더라도 이용자 보호를 강제할 수 없다. 선불전자지급업자에게 사용자의 선불 충전금을 외부에 의무적으로 예치하도록 하는 전금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현재 법적 구속력이 없는 행정지도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금법 개정 절차가 늘어지면서 금융 당국이 올해 약속했던 핀테크산업육성법도 제정이 미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갈등 조정은 ‘나 몰라라’… 대선 앞두고 포퓰리즘에만 몰두
현실은 이렇지만 정치권은 갈등 조정에는 관심이 없다. 전금법 개정을 두고 기존 금융 산업을 대표하는 금융 노조와 핀테크 산업을 키우려는 금융위원회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그간 지급 결제 부문을 관장했던 한국은행도 동참한 상황이다. 국회가 갈등 조정을 뒷전으로 미루면서 개정 논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상황이다.
정치권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되레 금융 산업을 옥죄는 ‘포퓰리즘’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서민금융 영역이다. 거대 여당은 법정 최고 금리 인하를 시작으로 ‘은행빚탕감법’ ‘이자멈춤법’, 이익공유제 등의 입법을 밀어붙이거나 논의하고 있다. ‘10% 이자제한법’을 포함해 20%까지 떨어진 최고 금리를 더 낮추자는 법안도 발의돼 있다. 대선을 앞두고 전 국민에게 최대 1,000만 원을 심사 없이 빌려주는 ‘기본대출’ 법안까지 등장했다.
여당은 가계부채가 위험 수위에 올라섰음에도 4월 보궐선거 참패 이후 청년·신혼부부 등을 위한 대출 규제 완화책도 내놓은 바 있다. 지난해 2분기 기준 가계부채는 1,800조 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200%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만큼 포퓰리즘 ‘광풍’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이달 초 ‘기본금융’ 공약을 발표하기도 했다. 전 국민 누구나 들도록 하는 ‘기본저축’ 제도를 도입해 기본대출의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게 골자다. 여기에 법정 최고 금리도 경제성장률의 5배 수준까지 낮추겠다는 것이다.
신성환 홍익대 교수(전 금융연구원장)는 “기본대출은 말장난이지 정책이라 할 수 없다”며 “정부에서 복지를 금융 섹터가 담당하라고 하면 국민경제에서 중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금융시장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