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8월 가석방 이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인 대외 일정은 지난달 김부겸 국무총리와 함께하는 청년 일자리 창출 행사 단 하나뿐이었다. 이 같은 정중동(靜中動)을 두고 진행 중인 재판이나 형기가 남아 있는 신분 때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달 26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위탁 생산한 모더나사의 코로나19 백신 243만 5,000회분이 28일부터 국내에 공급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 부회장의 지난 두 달간 행보가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잠행으로 비쳐지는 시간, 이 부회장은 백신 조기 도입을 놓고 밤낮없는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삼성의 이번 ‘모더나 007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 장면을 살펴봤다.
반도체 전문가까지 투입
27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모더나 백신 조기 도입에 사활을 걸고 이 부회장 지휘 아래 모든 역량을 투입했다. 목표는 안정적인 양산 체제를 하루빨리 구축하는 것. 국내 공급 물량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필수 과제였다. 이 부회장은 출소와 동시에 바로 모더나 백신 생산 계획을 점검했다. 당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모더나 백신을 생산하기 위한 기초 준비(설비·제조지시서·품질평가법)만 끝났을 뿐 대량 생산과 인·허가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이 부회장은 우선 삼성전자·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의 최고위 경영진을 소집해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삼성의 ‘스피드 경영’은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체크리스트를 토대로 매일 콘퍼런스콜을 통한 점검이 이뤄지며 생산 현장부터 최고경영자(CEO)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반도체 ‘초격차’를 주도하는 삼성전자 기술력도 고스란히 백신 생산에 녹아들었다. 삼성전자 스마트공장팀은 생산 초기 낮았던 수율을 단기간에 바이오 업계에서 인정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물질 검사 과정에는 반도체 전문가들이 투입됐다.
모더나 최고경영자와 핫라인 구축
아무리 백신 양산 시점을 앞당겨도 발주처인 모더나가 ‘OK’를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이 부회장은 의사 결정권을 쥔 스테판 방셀 모더나 CEO와 직접 접촉하는 데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오랜 지인이 모더나와 거래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그를 통해 방셀을 소개받는다. 이 부회장과 모더나 최고경영진은 올 8월 바로 화상회의를 열고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인 백신 생산을 통해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중장기적으로 바이오 산업 전반으로 협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이 부회장과 방셀 간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삼성과 모더나는 위탁자·생산자라는 단순 거래 관계가 아닌 백신 수급과 바이오산업의 미래를 함께 논의하는 사업 파트너 관계로 격상됐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삼성으로서는 추가 수주의 기회와 더불어 백신 기술 확보까지 기대할 수 있는, 바이오 산업의 전환점을 맞이한 셈이다.
민관 협력 통해 인허가 절차 단축
마지막 관문은 인허가였다. 시험 생산한 백신이 허가를 받아 출하되려면 빨라도 연말쯤이라는 게 애초 예상이었다. ‘백신 조기 공급’이라는 목표 아래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관세청 등 정부기관과 삼성·모더나는 똘똘 뭉쳤다. 식약처는 전담 TF를 만들어 규정 내에서 활용 가능한 모든 대책을 실행했다. 삼성SDS 해외물류팀은 전 세계적인 물류난을 뚫고 백신 샘플을 아일랜드 유럽시험소까지 하루 안에 보냈다. 유럽시험소를 설득해 검사 인력을 추가로 지원받은 덕에 검사 일정은 4주에서 2주로 대폭 단축됐다. 올 초 화이자 백신 도입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삼성은 완벽한 팀워크를 보여줬다.
이 같은 결정적 순간에 힘입어 모더나 백신의 국내 공급 일정은 연말에서 10월로 앞당겨졌고 안정적인 대량 생산 체제도 갖췄다. 바이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광범한 글로벌 네트워크와 삼성의 기술력, 정부와의 팀플레이가 시너지를 내며 백신 문제를 해결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모더나 작전’의 성공으로 얻은 백신 243만 5,000회분은 시작일 뿐이다. 삼성-모더나 협력 체계를 통해 한국이 ‘백신 허브’로서 ‘K방역’에 이은 또 다른 국가적 위상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량 양산을 통해 만들어진 백신은 세계로 퍼져나가 세계경제를 빠르게 회복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만이 아닌 백신 전반의 경쟁력 제고도 예상된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원료 의약품 생산 설비를 증설할 예정이며 모더나는 기존의 백신을 mRNA 기반 차세대 백신으로 대체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은 바이오 의약품 관련 기술력과 생산능력에 이 부회장의 네트워크까지 갖췄다”며 “바이오산업이 더 탄력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