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고전통해 세상읽기]성재수간聲在樹間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꽉 막힌 현대인의 집과 일터

계절 변화 알아채기도 어려워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내면의 울림도 듣지 않을까





가을은 시각과 청각 중 어느 쪽이 사람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올까. 집 주위나 산에 울긋불긋한 단풍을 떠올리는 사람은 단연히 가을은 시각적이라고 말할 듯하다. 나뭇잎이 땅에 다 떨어지고 나면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앙상한 가지도 사람의 눈길을 끌지만 단풍만큼이나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갖기가 쉽지 않다. 가을이 깊어지면 바람이 차가워져서 사람은 저절로 조금 두꺼운 옷을 찾고 길을 걸을 때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실생활에서 가을의 청각성에 영향을 받지만 잘 의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이 생활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집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파트의 고층에 살게 되면 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서 가을의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다. 또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는 일터에 있으면 계절의 변화를 알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우리는 가을의 시각성을 보려고 하고 멀리 명소를 찾아서라도 즐기려고 하는 반면 청각성을 막으려고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유독 음악에 한해서 이어폰을 끼고 혼자서 들을 정도로 예외를 둔다.



여행을 가거나 시골에 가면 우리 시선은 자연히 낮게 깔린다. 시선이 낮게 깔리는 만큼 소리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새가 나무를 옮겨가며 내는 소리, 계곡과 강에 흐르는 물소리, 바람이 건물을 돌거나 나무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처럼 자연의 소리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나누는 말과 웃음, 도로를 달리는 차가 내는 경적처럼 사람으로 인한 소리가 있다. 이렇게 보면 가을은 시각적이기도 하면서 청각적이기도 하지만 현대인은 청각성을 선택적으로 즐기는 반면 시각성에 관해서는 편집적인 선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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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송나라 구양수(歐陽修)는 ‘추성부(秋聲賦)’를 창작해서 가을의 시각성보다 청각성을 노래한 적이 있다. 조선 후기 김홍도는 예순의 나이를 넘겼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망 연도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행적이 알려진 최후의 1805년에 특별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다. 그것이 바로 구양수의 ‘추성부’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추성부도(秋聲賦圖)’다.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구양수가 읊은 ‘추성’이 어디에서 생겨나서 어떻게 들리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은 원래 소리를 담을 수 없지만 ‘추성부도’를 보면 시각화로 전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김홍도의 뛰어난 공감각화를 느낄 수 있다.

‘추성부’는 구양수가 밤에 책을 읽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갑자기 서남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정체를 모르니 섬찟 놀랄 정도다. 귀를 기울여보니 바람 소리인 듯 파도 소리인 듯 비바람 소리인 듯 부딪쳐서 내는 쇳소리인 듯 전장을 달리는 사람과 말소리인 듯 온갖 소리가 뒤섞여 있다. 구양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동자더러 밖에 나가 무슨 소리인지 살펴보라고 했다. 동자는 돌아와서 “하늘에 달과 별이 빛나고 은하수가 걸려 있고 어디에도 사람 소리가 나지 않고 나뭇가지에 소리가 걸려 있다(성월교결·星月皎潔, 명하재천·明河在天, 사무인성·四無人聲, 성재수간·聲在樹間)”고 아뢨다.

구양수는 자신이 들은 소리가 사람이 내는 소리일 것으로 추측하다가 나뭇가지에서 나는 가을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됐다. 이어서 그는 가을의 형상을 어두운 색상, 청명한 모습, 차가운 기운, 쓸쓸한 느낌의 측면에서 두루 살펴본 뒤에 무성하던 풀이 누렇게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변화를 설명한다. 이러한 변화에도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까지 생각하고 지혜로 풀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하면서(사기력지소불급·思其力之所不及, 우기지소불능·憂其智之所不能) 초목과 함께 쇠락해간다.

‘추성부’를 읽으면 다소 쓸쓸한 분위기에 젖을 수 있지만 더 이상 떨쳐낼 수 없고 남겨야 하는 자신의 고갱이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가을 소리를 듣기보다 소리의 발신자가 되려고 다툰다. 자신의 음량을 높이려고만 할 게 아니라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봄에 나서 여름 내내 햇볕을 받아냈던 나뭇잎이 땅에 닿는 소리며 나뭇잎이 떨어지고 난 뒤 가지에 직접 부딪혀 내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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