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주자’ 신분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전 국민 지원금을 당정에 직접 지시하고 여당이 이를 불과 11일 만에 속전속결로 수용하면서 재정 당국인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좁게 보면 재원 마련 방안이 불분명해 나라 살림에 부담을 안긴다는 것이고, 넓게 보면 정부의 예산 편성 기능을 정치 권력이 완전히 패싱하는 상징적 사건이 벌어졌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목소리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9일 “행정부 수반도 아닌 대선 주자의 말 한마디로 나라 예산안이 통째로 뒤집어진다면 예산 당국이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슬그머니 빠지는 형국이다. 이날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당정이 의견을 조율하면서 현명한 결론을 도출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전 국민 위드 코로나 방역지원금’으로 이름을 바꿔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총 13조 원은 재원 마련부터 막막하다.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지원금 예산을 2022년도 본예산에 반영하고 그 재원은 올해 초과 세수를 내년으로 납부 유예하는 방식으로 마련하겠다”고만 밝혔다. 올해 세수를 내년으로 미루는 것은 ‘이재명 지원금’에 들어갈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더 늘리겠다는 일종의 꼼수로 볼 수 있다. 초과 세수는 정상 절차대로라면 회계 결산을 거쳐 ‘세계잉여금’ 항목으로 편입된 뒤 국가재정법에 따라 △지방교부세 및 교부금 정산(40%) △공적자금상환기금 출자 및 채무 상환(30%) △다음 연도 세입 이입(30%)의 순서로 배분된다. 가령 올해 10조 원의 초과 세수가 발생하면 3조 원가량만 내년 예산에 반영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올해 받을 세금을 내년으로 미루면 지방세 교부 의무만 남고 채무 상환으로 반영해야 할 의무는 사라져 그만큼 가용 재원이 늘어나게 된다. 국민의 세금으로 여당 대선 후보의 지원금 공약을 위해 어이없는 꼼수를 부리는 셈이다. 오죽하면 정의당에서 ‘매표’ 행위라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나왔다.
여기다 납부 유예하겠다는 세금의 구체적 세목(稅目)과 규모를 기재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기재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도대체 어떤 세목을 내년으로 미루겠다는 것인지, 거기서 걷을 수 있는 세금이 얼마인지, 여당과 전혀 협의가 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여당이 재정 시스템 자체를 패싱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예산을 짜고 집행하는 행정부의 권한을 깡그리 무시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내년 예산을 주무르는, 있어서는 안 될 선례를 남기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 유예할 세목을 억지로 만든다고 해도 올해 세금 대부분은 이미 납부가 완료돼 납부 유예의 실효가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다. 국세는 크게 나눠 소득세·법인세·부가세 3대 축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사업소득세나 법인세 등 덩치가 큰 항목은 이미 올해분 납부가 마무리됐다. 미루고 싶어도 미룰 세금 자체가 남아 있지 않은 셈이다. 올해 5조 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종합부동산세의 경우 납부 기한이 12월 15일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지방이 가져다 쓸 돈이기 때문에 납부 유예를 할 이유가 없다. 이 밖에 목적세로 분류돼 용처가 미리 정해져 있는 교통세 등도 납부 유예를 해봐야 ‘이재명 지원금’에는 반영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여당이 납부 유예와 같은 ‘꼼수’를 전부 동원해도 올해 초과 세수에서 가져다 쓸 수 있는 자금은 총 4조~5조 원 안팎에 그칠 것으로 분석된다. 지원금을 주기 위해서는 어쨌든 10조 원가량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10조 원의 부족 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은 예산 심사 과정에서 강력한 세출 구조 조정을 통해 사업 예산 상당수를 삭감하던가 국채를 찍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업 예산을 함부로 삭감했다가 더 큰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10조 원 내외의 국채 발행을 통한 재원 조달이 유일한 해법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의 한 증권사 채권운용 담당자는 “최근 금리가 급등하고 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여당이 국채를 더 찍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며 “국세 납부 유예 같은 실체가 모호한 말을 하는 것도 ‘일단 소나기는 피하자’는 전략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 후보와 민주당을 중심으로 최근 나라 재정의 ‘팩트’와 동떨어진 발언이 쏟아져나오자 기재부 내부에서는 여당이 말하는 초과 세수가 올해분 초과 세수가 아니라 내년도 초과 세수를 뜻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에서 국세 수입은 338조 6,000억 원인데 이보다 40조 원이 더 걷힐 수 있다고 여당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있고, 이런 분석이 외부로 나오는 과정에서 메시지에 혼선이 빚어진 것이라는 해석이다.
최병호 부산대 교수는 “현재 상황에서 전 국민에게 똑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은 피해 회복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필요하다면 특별한 피해를 본 특정한 계층에 포커스를 맞춰야 하고 그 재원 조달 방안도 국채 추가 발행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