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독립영화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대상과 함께 독립스타상(이봉하 배우), 독불장군상 등 3관왕을 차지하고 국내외 다수의 영화제에서 찬사가 이어지고 있는 노동자 영화. 두 딸을 둔 아빠이자 해고노동자인 재복이 떠난 열흘 간의 휴가,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이야기다.
그동안 뉴스 따위에서 비추어졌던 해고노동자들은 파편화한 농성 사진과 영상들이 대부분, 이는 그들을 우리와 다른 ‘비일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우리 사회 대표적인 장기투쟁 사업장인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의 사연에서 시작된 영화 ‘휴가’는 그간 농성장의 큰 목소리에 감춰졌던 이들의 섬세한 감정을 만나볼 수 있다. 오영이가 이 영화를 통해 농성장에 가려진 텐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빠, 이제 서울 가지 마
영화는 강남역 앞 농성장에서 시작한다. 영석(서광택 배우), 재복(이봉하 배우), 만용(황정용 배우)은 선인가구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1,882일 째 강남역 앞에서 장기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에서 패소한 뒤, 지칠 대로 지쳐 서로를 탓하다 결국 잠시 쉬기로 했다. 열흘 간의 휴가를 떠나게 된 주인공 재복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약 5년간의 긴 투쟁 끝에 돌아간 집은 낯설기만 하다.
어느새 예비 대학생이 되어버린 첫째 딸. 대학 수시전형에 합격했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당장 등록 예치금 60만 원을 마련해야 한다. 딸 입장에서는 아빠가 서운하다. 이왕 집에 돌아온 김에 다시 투쟁하러 서울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울 가지 마”, 아빠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찮다.
자신의 노동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외로운 사투. 그리고 부양할 가족이 있는 현실. 이에 당면한 재복은 과연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갈까? 영화는 노동자로서 자신의 명예와 현실 사이 간극을 메우고자 분투하는 일련의 과정을 재복 시선으로 조용히 따라간다. 만약 우리가 재복과 같은 상황이라면 오랜 기간 길바닥에서 버틸 수 있을까?
‘손’으로 건네는 조용한 위로
영화 ‘휴가’는 재복의 손에서 시작해 손에서 끝나는 영화다. 낯선 이들에게 해고노동자의 처지를 알아달라 말하는 재복의 떨리는 손은 벽에 대고 외치는 것 같은 이들의 막막함과 모멸감을 대변한다. 재복이 휴가를 떠난 후, 그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포근하다. 투쟁할 때 함께하던 이들의 밥을 책임지더니,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린다. 막혀있던 집 싱크대를 금방 뚫어내고 같이 일하던 준영(김아석) 집의 고장난 보일러도 뚝딱 고친다.
친구 우진(신운섭)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복의 투박한 손은 우직하다. 준영에게 산업재해 신청서를 건네는 손은 강인하다. 재복의 손은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 이렇듯 손으로 밥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고,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내는 노동자의 손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하게 노동의 가치와 연대의 의미를 보여준다.
영화 ‘휴가’는 대사로는 다 전할 수 없는 노동의 숭고함, 가족과 동료를 아끼는 마음을 손으로 조용히 건넨다.
이란희 감독은 2009년 단편영화 ‘파마’를 시작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섬세하게 담은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어 왔다. 이 감독의 장편 데뷔작 ‘휴가’는 전작에 이어 한층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위태로운 삶의 밥줄을 붙들고 살아가는 모두를 위로한다. ‘휴가’ 이전 제작된 단편 ‘천막’이 농성장 안에서의 인물들의 갈등을 담았다면 여기에서 확장된 장편 ‘휴가’는 농성장 밖, 해고노동자들의 일상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층 더 내밀하게 담았다.
또한 81분의 상영 시간동안 들려오지 않는 음악은 영화 속 인물의 감정에 대해 속단하지 않으려는 배려로 보인다. 영화를 보는 이들 각자가 느낀 대로 이입해서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휴가’는 이렇듯 부재를 통해 더 많은 것을 관객에게 말을 거는 영화다. 오늘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화 ‘휴가’는 가까운 독립영화 상영관에서 예매할 수 있다. 미리 영상 리뷰를 보고싶다면 유튜브에 ‘오영이’를 검색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