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대한민국 명장 선정을 위해 3차 면접 심사가 열렸다. 17명의 심사 위원들 앞에 38세의 젊디 젊은 후보자가 섰다. 당시만 해도 명장 하면 대부분 환갑, 아무리 젊어도 50대 이상이었던 시기. 심사장이 술렁였다. “너무 젊은 것 아냐”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다른 심사 위원도 나이를 문제 삼았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히 심사를 통과했다. 20~30년 이상 된 낡은 금형 기계만 갖고 회사를 대기업 1차 협력 업체로 이끈 그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30대 명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원용기(48) 비즈엔몰드 대표는 30년 동안 금형만 바라보고 살아온 ‘금형 바보’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기능장 자격증과 특허, 연구 활동은 물론 컨설팅 자격증까지 모두 금형과 관련된 것들이다. 22일 인천시 가좌동 비즈엔몰드 사무실에서 만난 원 대표는 “금형은 나의 전부다. 금형이 없었다면 뭘 했을까. 상상이 안 된다. 다시 태어나도 금형을 할 것 같다”고 고백한 이유다.
그가 금형을 선택한 것은 원해서가 아니었다. 원 대표는 “원래 꿈은 교사가 되는 것”이라며 “하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도 병환으로 경제활동을 못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직업훈련학교에 들어갔고 병역 특례를 찾다 보니 우연히 금형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가고 싶어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주하며 살아가기는 싫었다고 한다. 직업훈련교수 자격증과 기능사·기술지도사 자격증도 취득했고 대학에서 석사 학위도 따냈다. 그렇다고 회사에 게으른 것은 아니었다. 관련 인증을 만들고 특허도 회사 이름으로 냈다. 본부장을 지내면서 연구소도 만들었다. 그가 회사를 떠날 때 사장이 몇 번이나 만류했던 이유다.
원 대표가 창업에 나선 것은 입사한 지 17년 6개월이 지난 2009년. 당시 가지고 있는 기계라고는 밀링과 20년 된 방전기, 30년이 지난 연삭기 등 달랑 3대뿐이었다. 그럼에도 대기업 1차 협력 업체가 될 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창업 당시에는 오래된 기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며 “그럼에도 명장 심사 위원 중 한 명은 이런 기계를 가지고 대기업에 납품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가점을 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금형에 대한 원 대표의 열정은 그만의 확고한 철학을 만들어냈다. ‘금형은 공평하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에 참여했을 때 지원 혜택이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고 한다. “금형은 대량 생산을 하는 수단입니다. 재료만 있으면 무한정 공급할 수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저렴하게 제품을 쓸 수 있죠. 금형은 사람들을 행복하고 윤택하게 합니다.”
금형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원 대표가 다른 산업과의 융합을 시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금형은 철강·도금·인쇄 등 수많은 주변 산업과 연계돼 있다. 금형이 쓰러지면 제조업 전반이 무너진다”며 “이 때문에 금형이 앞으로 타 산업과 연계 또는 융합해 더 부가가치 있는 산업으로 나갈 것”으로 내다봤다. 원 대표가 ‘클리킨스(CLIKINS)’라는 브랜드로 1회용 바늘, 수술용 실 등 피부 관련 제품을 만드는 것도 이러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뿌리 산업 기술 인력이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그것이다. 원 대표는 “공무원들이 젊은이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도전하기보다 안정적인 직장만을 찾는다는 의미”라며 “관리 인력이 생산 인력보다 많아서는 우리 사회가 생산적으로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사회가 변하기 위해 회사도, 개인도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회사의 역량을 키우려면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아야 하고 그들이 자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직원들도 너무 빨리 성과를 기대할 게 아니라 10년 정도 투자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