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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백제의 恨 서린 곳…'스러진 민족혼' 붉게 어리고

◆'역사의 여울목' 공주

공산성 곳곳 '무너진 백제의 시간' 스며있어

성벽따라 밝혀놓은 빛엔 '중흥의 꿈' 잔상이

조선시대 248명이 순교한 '황새바위 성지'선

100여 년간 '천주교인 박해' 아픔이 그대로…

동학군 연합, 일제와 사투 벌인 '우금티 일대'

참혹하게 희생된 순국선열 숨결에 숙연해져

공산성은 475년(문주왕 1년) 백제가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한 후 538년(성왕 1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도읍 역할을 했던 산성이었다.공산성은 475년(문주왕 1년) 백제가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한 후 538년(성왕 1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도읍 역할을 했던 산성이었다.




공산성은 475년(문주왕 1년) 백제가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한 후 538년(성왕 1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도읍 역할을 했던 산성이었다.공산성은 475년(문주왕 1년) 백제가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한 후 538년(성왕 1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도읍 역할을 했던 산성이었다.


공주시는 부여군·익산시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분류된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와 달리 패전국 백제의 유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공주에는 적지 않은 사적이 남아 있다. 웅진성과 연관된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송산리고분군 등이 모습을 보전하고 있다. 일대가 지난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다.



공주를 상징하는 유적 중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웅진성으로 불리다가 고려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475년(문주왕 1년)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538년(성왕 16년)에 다시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도읍 역할을 했던 산성이다.

성의 구조는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 봉우리까지 이르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는 2,450m에 달한다. 이우근 해설사는 “성안에는 7~8m의 호(壕)와 북쪽에는 높이 2m, 너비 1.5m의 석축 성벽이 남아 있다”며 “진남루 앞의 공터는 백제의 궁터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공산성의 규모를 가늠해보려면 백제큰다리를 건너 우회전한 후 둔치 주차장으로 내려가 강 건너편을 조망하는 게 좋다. 특히 밤에는 성벽을 따라 밝혀놓은 불이 아름답다.

공주 일대에서 100여 년간 이어진 박해의 와중에 확인된 순교자만 248명에 달하며 이들의 이름은 황새바위 지하 경당에 새겨져 있다.공주 일대에서 100여 년간 이어진 박해의 와중에 확인된 순교자만 248명에 달하며 이들의 이름은 황새바위 지하 경당에 새겨져 있다.



천주교 유적지 황새바위도 들러봐야 하는 유적지다. 바위 위 솔숲에 황새가 서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천주교 신도들이 항쇄(목에 씌우는 칼)를 차고 바위 부근으로 끌려가 처형된 ‘항쇄바위’가 ‘황새바위’로 불리게 됐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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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 순교성지의 안내문에 따르면 공주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신해박해(1791년) 이전으로 1791년 김명주 등이 이존창 루도비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관찰사 박종악의 기록에도 ‘1792년 공주 신상면에서 이덕침 등 4형제가 사학을 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100여 년간 이어진 박해 와중에 확인된 순교자만 248명에 달하는데 황새바위 지하 경당 대리석에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달레 신부의 조선 천주교 전래 기록에 따르면 ‘황새바위 아래 제민천변 백사장에서 신자들이 처형되는 날이면 수많은 백성들이 흰옷을 입고 공산성 위에 병풍처럼 둘러서 집행을 지켜봤다’고 적시돼 있다.

무덤 경당과 순교자의 탑 등 주변이 잘 정비돼 있어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와 일반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패한 우금티에는 동학혁명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패한 우금티에는 동학혁명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 공주는 또 다른 역사의 여울목이 됐다. 남접과 북접의 동학군 연합이 일본군·조선 관군의 병력과 맞붙어 이인과 우금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1894년 9월 다시 봉기한 동학 남접의 접주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주와 수원을 거쳐 서울을 공격하기로 했다. 전봉준은 먼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로 올라와 그해 10월 논산에서 손병희의 북접군과 합류했다. 한편 신정희·이두황·허진 등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정부군은 200여 명의 일본군과 합세해 농민군을 공략하기 위해 공주로 향했다. 이후 10월 23일 이인·효포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인 농민군은 신무기를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에 패해 후퇴했다. 동학농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1월 초 우금티를 주 공격로로, 곰티·곰내·하고개·주미산 쪽을 보조 공격로로 정하고 금강 건너 유구 쪽에 병력을 배치해 11월 8일 총공격을 시작했지만 또다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일본 연합군에 패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돼 일본군에 넘겨졌고 서울로 압송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공주시 금학동 일대. /글·사진(공주)=우현석 객원기자


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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