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현빈은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의 장겨울 역으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뒤 곧바로 정반대의 장르와 캐릭터를 선택해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전작 종영 이후 곧바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묵직한 존재감과 건조한 표정으로 새로운 얼굴을 완성했다.
JTBC 수목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극본 유보라/연출 임현욱)은 아내와 엄마라는 수식어를 버리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여자 정희주(고현정), 그리고 정희주와의 짧은 만남으로 제 인생의 조연이 돼 버린 또 다른 여자 구해원(신현빈)의 이야기로, 정소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구해원은 믿었던 절친한 언니 정희주와 자신의 약혼남 서우재(김재영)의 외도로 상처를 받고 이들 곁을 맴돌며 복수를 꿈꾼다.
"예전에 원작 소설 '너를 닮은 사람'이 나왔을 때 봤어요. 세월이 지나면서 희미해져 잊고 지내다가 드라마의 원작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올렸죠. 원작의 길이는 워낙 짧아서 설정만 가져왔다고 들었는데, 드라마로 각색되면서 더 풍성해지는 걸 느꼈어요. 인물들의 모습이 한 면으로만 그려지지 않고 각자의 입장이 부각되더라고요. 뒷얘기가 흥미로웠고, 궁금해져서 작품을 선택하게 됐죠."
'슬의생' 시즌2과 '너를 닮은 사람'의 촬영은 맞물려 진행됐다. '슬의생' 시즌2 속 장겨울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해 사랑스럽고 달달한 모습을 보여줬고, '너를 닮은 사람'의 구해원은 처절하게 고통받는 모습이었다. 전혀 다른 작품과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는 건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신현빈은 연기적인 몰입도는 물론,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까지 고민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선배들과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고, 명쾌한 답을 내렸다. 그는 시청자들이 장겨울과 구해원이라는 캐릭터 자체로 받아들여 준 것 같아 감사하다고 미소를 보였다.
"선배들과 친구들은 오히려 다른 캐릭터기에 집중하는 데 나을 거라고 조언해 주더라고요. 비슷한 두 개였다면 한 작품에 매몰될 수 있는데, 다르니까 밸런스가 맞을 거라고요. 촬영해 보니 조언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아요. 한 사람으로 심각하게 있는 게 아니니까 몰입이 잘 됐죠. 두 작품을 동시에 해서 체력적으로 힘든 건 있었어요. 주변의 관심과 걱정 속에서 먹을 수 있는 영양제는 다 먹은 것 같아요."
구해원은 너무 건조해 물을 뿌려주고 싶을 정도로 메마른 성격을 지녔지만, 믿었던 친한 언니와 사랑하는 남자의 외도로 두 사람에게 동시에 배신 당하는 일을 겪으면서 깊이 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간극을 지녔다. 건조함과 깊은 감정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감독은 신현빈에게 감정을 덜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처음에는 구해원이 어느 정도로 소리를 질러야 되고 울어야 되는지 감이 오지 않아 고민도 많았다는 신현빈. 특히 구해원의 상황이 처절해질수록 가슴이 아파 툭하면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후반부로 어떻게 해도 자신이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구해원의 상황이 서러워 리허설부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편집의 힘을 빌려 눈물을 덜어내기에 이르렀다고.
구해원의 복수 방법도 신현빈이 이해해야 할 지점 중 하나였다. 정희주와 서우재의 외도를 알면서도 바로 내색하지 않고 이들 곁에서 은밀한 압박을 가했다. 폭로와 협박이라는 직관적인 복수가 아닌, 서서히 목을 조르는 방법을 선택한 것. 신현빈은 구해원이 정희주에게 사과할 기회를 계속해서 준 거라고 해석했다. '이래도 사과 안 해?'라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실제 구해원과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상상하면서 캐릭터를 구축했어요. 정말 친하고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니 그냥 잊고 못 살겠더라고요. 구해원은 그냥 사과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상대방이 그냥 미웠으면 협박하고 폭로한다는 쉬운 길도 있었겠죠. 구해원은 그러지 않고 정희주 곁을 맴돌아요. 구해원 입장에서는 사과할 기회를 준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해원의 캐릭터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스타일링에도 신경 썼다. 더 겹겹이 입고, 팔 토시까지 꼈다. 머리는 덥수룩하게 바꿨고, 옷도 정돈되지 않은 방치된 느낌으로 고쳤다. 메이크업도 혈색이 없어 보일 정도로 덜어냈다. 이 모든 게 구해원의 미련을 대변하는 의미였다. 깔끔한 것보다 겹겹이 옷을 입은 사람이 주는 인상이 다르다고 판단해 복잡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드라마의 어두운 분위기와 다르게 촬영 현장은 화목했죠. 고현정 선배님과 장난을 치면서 편하게 촬영에 임해 든든하고 재밌었어요. 김재영은 분위기 메이커였는데, 실없는 농담을 잘 해서 즐거웠고요. 서우재는 어둡고 집착이 심한데 실제 김재영의 성격은 정반대였어요. 이렇게 화목한 현장 분위기가 메이킹에 잡혀 도리어 시청자들의 몰입을 떨어트릴까 걱정될 정도였죠."
'너를 닮은 사람'은 "결국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는 정희주의 내레이션으로 끝났다. 서우재는 정희주의 딸 안리사(김수안)에 의해 사망했고, 정희주는 사랑하는 딸 대신 서우재의 시체를 처리했다. 이를 눈치챈 구해원은 정희주를 협박했고, 결국 정희주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사라졌다. 신현빈은 세 사람이 모두 행복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결말을 맞은 것 같다고 털어놨다.
"정희주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이었는데, 딸을 지키기 위해 평생 아이들과 만날 수 없는 선택을 하죠.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벌을 받은 것 같고, 정희주가 떠난 공간이 곧 지옥이 된 거라고 생각해요. 딸을 지옥에 보낼 수 없으니까요. 구해원의 인물 소개를 보면 '조연이 된 여자'라는 말이 나와요. 그는 정희주의 이야기에서 조연이었다가 모든 것이 끝난 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해요. 어딘가에서 구해원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떠나보냈어요."
'너를 닮은 사람'은 시청률 2~3%(닐슨코리아/전국 유료 기준) 대를 유지하면서 종영했다. 그는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넷플릭스, 티빙 등 OTT 플랫폼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것에 위안을 얻었다. '너를 닮은 사람'은 넷플릭스에서 한국 TOP 1위를 차지했고, 티빙 많이 본 콘텐츠에서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신현빈은 시청률과 OTT에서 다른 성적표를 받은 것은 드라마의 성격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집에서 TV를 켜놓고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와 다르게 '너를 닮은 사람'은 극의 분위기도 어두울뿐더러 서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마냥 즐겁게 볼 수 없기에 시청률 면에서는 아쉬웠으나 생각할 거리를 곱씹을 수 있는 장르잖아요. 이런 걸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OTT에서 따로 찾아봐 좋은 성적을 얻은 것 같아요. 인물들의 입체적인 면모 역시 매력적이죠."
지난 2010년 영화 '방가? 방가!'로 데뷔한 신현빈은 어느덧 데뷔 11년 차를 맞았다.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던 그가 대중의 집중 조명을 받은 건 '슬의생' 이후부터다. 묵묵하고 꾸준히 자신의 분야에서 기반을 닦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사한 마음이 제일 크죠. 바쁜 날들이 더 많아진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제가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더라고요. 친구들도 비슷하고 살아가는 것도 비슷해서 어마어마하게 달라진 건 못 느끼겠어요. 여행을 좋아하는데, 바빠진 것과 코로나19 시국이 겹치다 보니 여행도 못 가게 됐어요. 밖에 못 나가니 더 차이를 못 느끼나 싶어요."(웃음)
신현빈은 매 작품 자신도 모르는 모습이 불쑥 나올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얼굴을 계속 보면서 사는 게 아니기에 몰랐던 순간들이 있다고 돌아봤다. 카메라에 잡힌 낯선 모습을 볼 때, 평상시를 돌아보고 한참을 분석한다고. 이를 발판 삼은 신현빈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두 작품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괴이'에서도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