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제 명함은 ‘대표이사’가 아닌 ‘소장’입니다. 설계사무소에서는 소장이라는 타이틀이 가장 명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립 31년 차를 맞은 해안종합건축사사무소는 국내 건축사사무소 중 최고 수준이자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대형 회사다. 창업주로서 여전히 현장에서 뛰고 있는 윤세한(61) 대표이사는 경영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지만 현업에서 설계 업무를 맡을 때가 가장 재미있다고 했다.
지난 1990년 설립된 해안건축은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설계사무소다. 정부세종청사와 국회 소통관, 세빛섬,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등 손꼽히는 랜드마크가 해안건축의 손길을 거쳤다. 작은 작업실 개념의 ‘아틀리에’로 시작한 해안건축은 이제 건축·PCM·도시·조경·EV·인테리어·녹색건축 등 프로젝트 전 과정을 책임지는 대형 종합 건축사사무소가 됐다.
2006년 미국 뉴욕법인 설립을 시작으로 카타르·베트남·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지사를 세우는 등 해외 사업도 본격화하고 있다. 윤 대표는 국내 주요 대형 건축사사무소 창업주 중 유일하게 현업에서 회사의 미래를 이끌고 있다.
<해고 없이 매년 성장…‘해안웨이’로 경영철학 집대성 이뤄>
해안건축은 감사 보고서 기준으로 지난해 1,53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국내 건축사사무소 중 2위 실적을 기록했다. 직원 수는 약 1,200명 수준까지 늘어났는데 직원 3명으로 창사한 뒤 매년 인력을 늘려오면서 지금껏 한 번도 구조조정으로 인력을 감축한 적이 없다. 고용된 건축사 수로 순위를 매기는 ‘세계 100대 건축사사무소’에서는 올해 유수의 글로벌 건축사사무소를 제치고 13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60년에 태어나 강원도 원주에서 성장한 윤 대표는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당시 가장 큰 설계사무소였던 서울건축에서 일을 시작했다. 5년간 근무하며 건축사 자격을 딴 그는 1990년 해안건축을 창업했다. 윤 대표는 창업 초기부터 “절대로 급여를 하루도 늦추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어왔다. 당시 설계 업계는 박봉과 급여 체불이 일상인 열악한 곳이었다. 그는 “월급도 적고 월급날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었던 시절이었지만 급여를 제때 지급하려고 마이너스통장을 쓸지언정 30년 넘게 한 번도 밀려 지급한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생각이 달라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아니면 인력을 감축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어긴 적이 없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도, 2008년 금융위기 때도 해안건축은 인력을 줄이기는커녕 매년 신규 인력을 채용해왔다. “계획대로 회사 규모를 키워왔다기보다는 병원·문화시설·오피스 등 다양한 설계를 모두 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일이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라며 “그렇게 회사를 이어오다 보니 금융위기 등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왔을 때도 ‘끝까지 가자’고 결정했다”고 했다.
창업 당시 윤 대표 스스로 했던 이 같은 다짐은 이후 ‘해안웨이’라는 개념화·명문화된 경영 이념이 됐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의 설계를 맡아 회사를 방문했던 윤 대표는 기업 문화의 핵심 가치를 담은 ‘아모레퍼시픽웨이’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2011년 해안건축의 소명과 비전, 추구하는 가치를 담은 ‘해안웨이’를 발표했다. ‘자연·사람·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살고 싶고, 가고 싶은, 특별한 장소를 만든다’가 핵심 목표다. 이를 위한 핵심 가치로 △소통·개방 △혁신·창의 △열정·도전 △헌신·실행 △정직·책임, 여기에 ‘플러스 알파’로 행복·재미가 담겼다. 경영 성과뿐 아니라 회사의 철학이 정리된 이 시기를 윤 대표는 ‘회사의 변곡점’으로 꼽았다.
윤 대표는 “우리의 모든 철학이 담긴 ‘해안웨이’를 통해 비전을 공유하고 소명을 인식해 다 함께 가자는 내용이 정리됐다”며 “CEO를 시작으로 윗직급부터 솔선수범하고 실천해야 이런 문화가 자리 잡는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60~70% 정도 왔다고 본다. 이것이 모든 구성원들의 몸에 배어 있다면 조직의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자연·도시 일체화된 환경 추구…한국 건축의 세계화는 소명">
확고한 경영철학도 확실한 성과가 바탕에 있어야 인정받기 마련이다. 해안건축의 진정한 가치는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다. 창의성을 바탕으로 유기적인 조직 문화가 뒷받침한 결과다.
윤 대표가 꼽은 인상적인 성과물 중 하나는 정부세종청사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도심 속 공공건축물’을 구상했다. 여러 사정으로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최초에는 언덕 등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설계했다. 건물이 언덕과 이어져 주차장이 옥상에 들어서고 지상이 아닌 옥상에 녹지를 꾸민 정원을 조성하는가 하면 필로티 공간을 주변에 온전히 개방하는 등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었다.
서울 마곡지구에 들어선 넥센 사옥 ‘더넥센유니버시티’는 대기업 본사와 연구소의 기능이 합쳐진 새로운 작품이었다. 최근에는 도시 설계로 영역을 확장해 고양창릉·수원당수 등 신도시 설계에도 집중하고 있다.
윤 대표는 “도시에 자연이 스며들어 사람과 도시·자연이 일체화된 환경을 추구하고 있다. 어디가 자연이고 어디가 도시인지 모르게 하는 것”이라며 “문명이 발생하는 곳이고 혁신이 일어나는 곳이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 수밖에 없다. 그런 도시를 만드는 것은 결국 건축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해외 진출도 놓칠 수 없는 목표라고 강조했다. 해안건축은 2006년 뉴욕에 법인을 세우며 해외 진출의 포문을 연 데 이어 2014년 이라크지사, 2018년 카타르·베트남지사, 2020년 사우디아라비아법인 등을 열면서 외연을 확장했다.
규모 면에서는 세계 수준에 밀리지 않게 됐지만 ‘한국 건축의 세계화’에는 아직도 과제가 많이 남았다고 했다. 그는 “국내 주요 건축물을 외국 건축가가 아닌 한국 건축가에게 맡기는 것, 해외의 주요 도시에 한국 건축가가 참여한 작품들이 세워지는 것 이 두 가지가 한국 건축 세계화의 중요한 과제”라며 “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이 됐지만 작품 수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발전해야 한다. 그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9년 준공된 ‘국회 소통관’은 처마를 본뜬 외형 등 한국의 정서가 짙게 묻어난다. 그는 “비 올 때 처마 밑에 서 있던 경험 이런 것들이 현대 한국 건축을 설명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건축 언어, 느낌을 잘 살려 꾸준히 추구하면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 대표의 남은 목표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리더’의 부재에도 꾸준히 유지 가능한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 있어 제가 없어도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회사를 이루는 게 제 소명”이라며 “그런 시스템을 완성해 국가적으로 기여하고 세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소중한 역할 중 몇 개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보람찰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