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몰락을 학술적으로 예측해낸 것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정치학자 요한 갈퉁은 2016년 12월 언론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선출이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후 5년이 지난 요즘 미국의 후퇴를 확인시켜주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11월 스웨덴 싱크탱크 IDEA는 미국을 ‘퇴보한 민주주의국가’ 목록에 올렸고 바버라 월터 미국 UC샌디에이고 정치학과 교수는 내년 초 출간하는 책 ‘어떻게 내전이 시작하나’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아노크라시(anocracy)’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아노크라시는 민주주의(democracy)와 독재(autocracy)의 중간쯤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우간다·캄보디아 등이 이에 해당된다. 1946년 유태계 독일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쓴 ‘유토피아의 협로’를 영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노크라시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우리말로는 부분적 민주주의, 혼합제, 중간 상태 등으로 번역된다. 시리아·레바논 등 내전국을 연구해온 월터 교수는 아노크라시로 접어든 미국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초기 충돌’ 단계를 지나 위험 상황으로 진입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1일 성명에서 올해 초 미 의회 의사당 난입에 대해 “부정선거에 대한 비무장 시위였다”고 주장했다. “기억하라. 반란 사태는 (1월 6일이 아닌 대선 날짜인) 11월 3일에 발생했다”면서 대선 불복까지 선동했다. 미국 하버드대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경고한 극단주의 포퓰리스트의 정권 장악에 이은 민주주의 후퇴를 미국에서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민주주의도 위태롭기는 매한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거대 여당의 폭주에 이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기자 통화 내역 조회와 ‘언론 사찰’ 논란 등으로 ‘선출된 독재’의 언저리에 다가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단 정권만 잡고 보자는 식으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여야 대선 후보들이 제대로 정치를 정상화하고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 내년 3월 대선은 민주주의 복원 여부를 가르는 선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