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오락가락 행보가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미중 전략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호주 국빈 방문 기간 일관성 없는 메시지를 내보내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는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호주 등의 중국 견제 동참 요구에 선을 그은 것이다. 문 대통령의 스탠스는 하루 뒤 180도로 바뀌었다. 14일 양국 공동성명서에서는 “인도태평양의 안정이 남중국해를 포함한 해양 영역에서 국제법 준수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고 선언했다. 인도태평양 전략과 베이징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가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일관성 없는 메시지를 냈으니 외교가에서 “문 대통령의 대중 외교 원칙이 뭔지 알 수가 없다”는 반응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 대통령의 원칙 없는 외교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략적 모호성에 매몰돼 지난 5년 내내 계속됐다. 사드 배치 문제가 대표적이다. 사드가 왜 한반도에 배치됐는가. 그것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중국의 요구에 굴복해 이른바 ‘사드 3불’ 약속을 덜컥 해주고야 말았다. 이는 두고두고 중국이 우리를 압박하는 빌미가 됐다. 원칙 없는 전략적 모호성이 어떻게 국익을 훼손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답답한 것은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20대 대통령 선거전이 가열되고 있지만 여야 대선 후보들은 막연한 구호만 외치고 있을 뿐 분명한 외교·안보 원칙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한미 동맹과 한중 협력 관계 증진을 말하고 있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한미 동맹 강화를 통한 중국 문제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두 후보 모두 ‘실용’과 ‘국익’을 강조하지만 무엇이 실용이고 국익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이래서는 전략적 모호성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방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여건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명한 원칙을 밝히고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광복 이후 번영의 길을 달려오면서 우리가 추구해 온 가치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인권·주권의 존중, 다자주의, 개방성 등이다. 중국이 힘을 내세워 우리를 압박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가치를 바탕으로 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원칙이 왜 중요한지는 싱가포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싱가포르는 인구가 580만 명에 불과한 소국인데다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어서 안보 면에서 취약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비결은 바로 원칙이다. 싱가포르는 중국계 주민이 77%에 달한다. 이는 정책을 펴는 데 있어서 상당한 압력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중국에 굽실대지 않는다. 어떤 이슈가 부각되든 원칙에 기반을 두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싱가포르는 미국과 동맹을 맺지 않았지만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방식의 협력을 통해 안보 불안을 해소하고 있다. 중국이 같은 조상과 언어를 공유하는 국가이면서 왜 자기들과 같은 시각을 공유하지 않느냐고 압박해도 싱가포르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싱가포르가 중국과도 잘 지낼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원칙은 작은 나라가 자국을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명분이라는 방패는 힘을 가진 나라가 작은 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등장한 후 미중 전략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안보는 물론이고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다. 이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싱가포르처럼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없이 전략적 모호성의 굴레 속에서 오락가락하면 생존만 더 위태로워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