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원하는 결과 나올때까지 수정…연구용역, 정권 '홍보용'으로 전락

['정책 연구용역' 부실 논란]

■ 폐해 커지는 '답정너식 연구용역'

당청 하수인 된 관료, 정책 당위성 위한 억지용역만 남발

상속세 개편 등 민감사안, 사례만 나열하며 결정 피하기도

높은 수의계약 비중·용역결과 비공개 '깜깜이 관행'도 문제

영산강 죽산보 전경 /연합뉴스영산강 죽산보 전경 /연합뉴스






세계적 공항 컨설팅 연구 기관인 프랑스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은 지난 2016년 국토교통부가 진행한 연구 용역에서 동남권 신공항과 관련해 김해공항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접근성 등 시장 잠재력과 항공관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두 경쟁자인 가덕도와 밀양시를 눌렀다. 하지만 4년 뒤인 지난해 11월 ADPi의 연구 용역 결과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덕도를 신공항으로 사실상 점찍은 정부 검증위원회의 서슬에 간단히 뒤집혔다. 주무 부처인 국토부 입장에서는 ADPi에 지급한 용역비 19억 원만 날린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을 석 달여 앞둔 28일 울산을 방문해 “나도 동남권 주민”이라며 “2029년까지 가덕도신공항이 꼭 완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 연구 용역이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 식으로 변질되고 있다. 당청이 정부 관료를 하수인으로 격하시키고 정부 관료는 억지로 정책의 당위성을 개발하기 위해 ‘끼워 맞추기’ 식 용역을 진행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탈(脫)원전 정책을 위해 밀어붙인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용역 과정을 보면 연구 용역이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형식적으로 뒷받침하는 용도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감사원에 따르면 한국수력원자력의 의뢰로 경제성 평가 용역을 맡은 삼덕회계법인은 2018년 5월 7일 내놓은 보고서 초안에서 원전 이용률 70%를 상정해 계속 가동 시 1,704억 원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나흘 뒤 이 회계법인은 산업통상자원부·한수원 등이 참석한 회의 끝에 원전 이용률을 60%로 고쳐 잡았다.



회의 뒤 평가 업무를 맡은 회계법인 직원은 한수원에 “처음에는 정확하고 합리적인 평가를 목적으로 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한수원과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맞추기 위한 작업이 돼버린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산업부가 특정 방향의 용역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나온 최종 보고서에서 평가된 계속 가동 이득은 224억 원으로 초안에서 도출된 금액보다 크게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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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뒤집은 4대강 정책에서도 ‘답정너’ 식 연구 용역의 폐해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정부는 2016년 4대강 인근의 녹조가 농작물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연구 용역을 진행해 “녹조는 자연 분해돼 벼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으나 최근 다시 1억 원을 배정해 비슷한 성격의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국책 연구 기관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대체로 자신들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결과를 내주는 연구 기관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다”며 “내년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상향 국내 영향 평가’에서도 정부 입맛에 맞는 연구진 중심으로 용역 팀이 꾸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답정너 식 연구 용역보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연구 용역 결과 뒤에 숨어 정책 판단을 미루는 사례마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조세재정연구원 용역 결과를 통해 발표된 상속세 개편이다. 시장에서는 상속세율 인하와 ‘유산취득세’ 도입과 같은 전면적 개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으나 기획재정부는 각 개편 방식의 장단점을 모두 나열하는 식으로 최종 결론을 미루는 방식을 택했다. 애초에 국회가 상속세 개편 검토를 요구했는데도 애꿎은 국책 연구 기관을 내세워 ‘면피’ 한 셈이다. 당초 올 연말로 예정돼 있던 탄소세 도입 관련 연구 용역 만료 시점을 대선 뒤인 내년 3월 이후로 미뤄 탄소세 도입 방안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일종의 책임 회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립대학 교수는 “과거 4대강을 옹호했던 교수나 학자들은 향후 연구 용역에서 모조리 배제돼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며 “관료들이 정책적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학자들이 방패로 희생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정부가 연구 용역을 진행하면서 입맛에 맞는 결과를 내주는 기관을 중심으로 수의계약을 맺거나 용역 결과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관행’도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실제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국가 연구 용역 정보 사이트에 공개된 정책 연구 결과물 중 기재부 수행 보고서의 자료 비공개율은 25.6%에 달해 외교부(36.8%), 국방부(33.8%) 다음으로 높았다. 연구 용역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점을 감안하면 정보 비공개 범위는 최소한으로 제한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쟁입찰 대신 수의계약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것도 고쳐야 할 관행이다. 실제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국무조정실이 진행한 정책 연구 용역 중 41.5%가 수의계약으로 진행됐다. 현행 국가계약법은 계약 금액이 2,000만 원 이하이거나 2,000만 원 초과 5,000만 원 이하 계약이더라도 특수한 지식이나 기술이 요구되는 용역은 수의계약이 가능하도록 해 정부 자의적으로 용역을 진행할 여지가 많다. 특히 국조실의 경우 2016년 19%였던 수의계약 비중이 지난해 70.0%까지 치솟았다. 민 의원은 “가급적 예외적인 경우에만 수의계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연구 결과의 비공개 사유도 엄격히 적용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종=서일범 기자·세종=김우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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