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초과 세수를 소상공인 지원에 활용해달라”고 13일 지시하면서 재정 당국인 기획재정부도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공식 돌입했다. 기재부는 그동안 대외적으로는 “추경 편성을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작업을 진행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청 사이에 어느 정도 물밑 교감이 있었다는 얘기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 3일 기자들과 만나 “방역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추경 편성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사실상 추경을 예고하기도 했다.
가장 큰 쟁점은 추경 규모다. 당정은 추경을 추진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공감대를 이뤘지만 아직 전체 규모에 대해서는 구체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일종의 ‘가이드라인’은 제시해놓은 상태다. 박완주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최근 “이번 추경이 최소 25조 원 규모는 돼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구체적인 예산안(案)은 나오지 않았지만 △현재 소상공인 손실 금액의 80%로 제한돼 있는 보상금액 상한을 100%까지 올려 1인 당 95만 원 안팎인 보상금액을 더 높여주는 방안 △보상과 별도로 지원금을 주는 방안 △한국형 급여보호프로그램(PPP)을 도입하는 방안 등이 모두 논의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PPP는 소상공인들에게 일단 대출금을 지급한 뒤 일정 기간 고용을 유지하는 등 조건을 이수하면 인건비와 임차료 등을 원금에서 탕감해주는 제도다. 대선을 앞두고 진행되는 이번 추경에 실질적으로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된 점을 감안하면 정부 제출 추경안도 20조 원 안팎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당정 안팎의 관측이다.
이 같은 선심성 돈 풀기의 재원은 결국 적자 국채 발행으로 조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지난해 초과 세수를 활용해 지원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엄밀하게 따져 법적으로 불가능한 지시다. 국가재정법상 지난해 초과 세수를 올해 추경에 쓰려면 오는 4월 ‘2021 회계연도 국가 결산’을 거쳐 세계잉여금을 확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과 세수가 얼마가 나왔든 4월 이전에는 이 돈을 추경에 활용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추가 세수 규모에 대해 기재부는 이날 발표한 ‘월간 재정동향 1월호’을 통해 지난해 11월 누적 추가 세수가 9조 원을 넘겼고 지난달에도 최소 18조 원 이상의 세수가 더 걷힌 것으로 보여 최소 27조 원의 추가 세입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그나마 이 자금 중에서도 지난달 발표한 일명 ‘소상공인 3종 패키지’에 4조 3,000억 원가량이 지출돼야 하고 여기서 또 남는 돈의 40%는 지방재정교부금으로 나가야 해 20조 원을 맞추기는 어렵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국채를 발행해 추경 재원으로 쓰고 이후 지난해 늘어난 세수 등을 활용해 빚을 갚는 게 정공법이지만 수십조 원대 국고채 발행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시장 혼란이 커질 수도 있어 기금을 조정하거나 내년 하반기 예산을 미리 가져다 쓴 뒤 국채를 분산 발행해 다시 채워넣는 방식 등이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당 일각에서는 이번 초과 세수에 한해 지방재정교부금을 내려주지 않는 방안도 거론된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조달하든 추경 사이즈 자체를 10조 원 미만으로 줄이지 않는 한 나라 살림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집안에 큰 빚이 있는데 보너스 100만 원이 더 나왔다고 해서 200만 원을 더 쓰겠다고 지출 계획을 잡는 꼴”이라며 “비(非)기축통화국이자 전 세계 최저 출산률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부채를 늘려도 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십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추경이 사상 유례 없는 졸속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문제다. 기재부는 설 연휴가 시작되는 이달 28일 이전까지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대선 선거 운동 개시일인 다음 달 14일 이전에 추경을 통과시키겠다는 여당의 시간표에 맞추기 위한 조치다. 사전에 어느 정도 편성 작업을 해놓았다고 해도 불과 보름여 안에 미니 예산을 뚝딱 만들어내야 하는 셈이다. 국회 역시 설 연휴 뒤 열흘 남짓한 기간에 추경안을 심사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사실상 야당이 추경 심사 과정에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는 “선거 전에 돈을 뿌리기 위해 정부를 겁박하면서 힘이 부치니 야당을 들러리 세우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만약 협의가 하고 싶다면 정부와 예산 협의 및 편성권을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