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2014년 8월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됐다. 세계적인 인기 작가의 책인 만큼 출간 직후 곧바로 국내 주요 서점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연말에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간들처럼 책 판매량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감소했고, 1년 정도 지나자 소설 부문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잊혀져 가던 이 책이 지난해 말부터 역주행을 시작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이달 첫째 주 소설·시·희곡 부문 100위권에 재진입하더니 둘째 주엔 50위까지 올라왔다. 책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드라이브 마이 카' 덕분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국내 개봉한 데다 칸 영화제, 골든글로브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연이어 수상하면서 책 판매량이 덩달아 늘어난 것이다. 출판사인 문학동네는 영화와 연관성을 강조하는 띠지를 다시 만들고, SNS 등을 통한 책 홍보도 시작했다.
영화 등 2차 창작물의 인기가 출간된 지 시간이 꽤 지난 원작 소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올해도 연초부터 나타나고 있다. 일본 추리 작가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비채 펴냄)’ 역시 최근 교보문고 소설 부문 주간 베스트셀러 100위 차트에 오르내리고 있다. 2015년 출간된 책이지만 이달 초 동명의 한국 영화 ‘경관의 피(감독 이규만)’가 개봉한 덕분이다. 영화의 주연 배우인 조진웅은 “사사키 작가가 책을 들고 촬영 현장을 직접 방문할 정도로, 한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고, 한국 독자들은 영화 개봉에 맞춰 책을 다시 찾으며 한국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 화답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10월 국내에 번역 출간된 토머스 새비지의 장편 ‘파워 오브 도그(민음사 펴냄)’ 역시 동명 영화의 후광 효과를 누리고 있다. 교보문고 영미소설 부문에서 전주 대비 200계단 이상 급상승하는 등 책을 찾는 독자가 최근 부쩍 늘었다. 소설은 1967년 미국에서 초판 출간 당시 평론단과 언론의 극찬을 받았지만 판매량이 1,000부에도 미치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알아본 독자가 그토록 적다니,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세기 넘게 세월이 지나 영화 ‘피아노’의 감독 제인 캠피언이 이 작품의 영화화에 나서면서 새비지의 걸작은 광활하면서도 쓸쓸한 서부를 배경으로 한 심리 서스펜스 영화로 재탄생했다. 동명의 영화는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고, 지난 10일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작품·감독·남우조연상을 차지했다.
이밖에 지난 12일 나란히 개봉한 할리우드 대작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하우스 오브 구찌(감독 리들리 스콧)’, 이달 말 개봉하는 일본 영화 ‘인어가 잠든 집(감독 츠츠미 유키히코)’ 역시 원작이 국내에 출간돼 있어 영화 개봉 후광 효과가 기대된다. ‘인어가 잠든 집’의 원작 소설은 한국에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영화는 아니지만 애플TV플러스를 통해 상반기 중 공개될 시리즈물 ‘파친코’ 역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이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