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동 개발 로비·특혜 의혹 사건의 초기 수사 단계에서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으로 작용했던 ‘정영학 녹취록’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검찰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진상 규명에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자칫 ‘봐주기 수사’ 논란으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일 한국일보가 보도한 녹취록에 따르면 지난 2020년 7월 2일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는 천화동인 5호 소유주 정영학 회계사에게 박영수 전 특검의 외사촌 동생인 이기성 씨를 언급하면서 “(이기성이) 나한테 ○○(박 전 특검 딸)에게 돈 50억 주는 거를 자기(이기성)를 달래. ○○이를 차려 주겠대”라고 말했다. 대장동 분양 대행사 대표였던 이 씨는 2019년 김 씨로부터 109억 원을 전달받아 이 중 100억 원을 토목 건설업체 대표인 나 모 씨에게 빌린 돈을 갚는 데 쓴 의혹을 받는 인물이다.
화천대유 설립에 박 전 특검의 자금이 쓰였다는 대화도 담겼다. 2020년 4월 4일 녹취록에서 김 씨는 정 회계사에게 “우리 법인 만들 때 돈 들어온 것도 박영수 고검장 통해서 들어온 돈”이라며 “(이)기성이 통장에. 그것은 해줘야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라고 말했다. 검찰은 화천대유가 포함된 성남의뜰 컨소시엄이 대장동 개발 사업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지 일주일이 지난 2015년 4월 4일 박 전 특검의 계좌에서 김 씨 계좌로 5억 원이 이체된 사실을 파악했다. 녹취록에 나타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박 전 특검이 대장동 사업의 초기부터 김 씨에게 도움을 준 것으로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녹취록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검찰이 느끼는 부담감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9월 정 회계사로부터 녹취록을 전달받고도 관련 혐의 기소는 전무한 데다 50억 클럽으로 거론된 이들에 대한 신병 확보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검찰·법원 출신 등 피의자에 부담을 느낀 검찰이 “소극적으로 수사를 진행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녹취록에 등장한 고위 법조인 출신들에 대한 소환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점도 문제로 꼽힌다. 의혹이 증폭되고 있음에도 검찰은 녹취록 공개에 대한 거부감만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전날 검찰은 녹취록 유출을 놓고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녹취록에 거론된 ‘50억 클럽’ 인사를 비롯한 사건 관계인들은 후폭풍 차단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박 전 특검과 김 씨 측 변호인은 각각 입장문을 통해 즉각 반박에 나섰다. 박 전 특검 측은 “해당 5억 원은 김 씨가 이 씨로부터 화천대유의 초기 운영 자금으로 차용한 돈”이라며 “돈의 사용처나 두 사람 간의 정산 문제 등 금전 거래가 어떻게 정리됐는지 전혀 알지도, 관여한 바도 없다”고 의혹을 일축했다. ‘자금 거래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김 씨의 부탁으로 박 전 특검의 계좌를 거쳐 화천대유에 자금이 이체됐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김 씨 측은 기존 입장대로 녹취록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김 씨 변호인은 “녹취록의 진위도 의문이지만 재판 절차에서 아직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은 증거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는 것은 형사소송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헌법상 보장된 피고인의 방어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